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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말 캄보디아의 왕위계승 전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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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5-13 00:28 조회1,7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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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끄라퐁은 그러나 늦어도 1989년에는 푼신펙 지도부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이복형제인 라나리드에게 더욱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그는 1991 훈센의 캄보디아인민당 측으로 넘어가 훈센 정부의 부총리직을 선사받았다. 부총리의 지위에서 그는 캄보디아의 민간항공 분야의 일을 맡기도 했다. 그의 새로운 위치에서도 라나리드와의 경쟁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패배의 잔을 마신 자는 자신이었다. 그러자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1993 5 동부 캄보디아의 6 주에서 국가전복을 시도했고 1994 7 2일과 3일에는 프놈펜에서 다른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데에서의 쿠데타는 모두 싱겁게 끝났다. 이로써 짜끄라퐁은 라나리드에게 뿐만 아니라 훈센에게도 도무지 가능성 없는인간으로 비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체포되었지만, 부왕인 시하누크의 간청으로 석방되어 말레이시아로 나갈 있었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그는 뒤에 시하누크 왕의 특별사면으로 캄보디아로 다시 돌아온 , 1999년에 로열 프놈펜 에어웨이즈(Royal Phnom Penh Airways)라는 이름의 항공 회사를 설립했다. 그의 항공 회사는 현재 170명의 직원이 일하고 러시아제 비행기로 다섯 항로를 운항하고 있다. 특히 앙코르 관광의 출발점인 시엄레압(Siem Reap)에서 프놈펜까지의 항로에서는 다른 캄보디아의 항공 회사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사업가로 변신한 짜끄라퐁은 앞으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장담한다.

 

시리붓  : 시하누크 왕의 이복동생이자 가장 중요한 조언자인 시리붓 왕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훈센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자로 알려지자, 1995 12 21 태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1996 캄보디아의 부재 재판에서 10 징역형을 받았으나, 왕의 사면으로 1999 1 20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올 있었다 7 4 시리붓은 푼신펙의 총서기에 임명되었다. 이에 대해 푼신펙의 총재인 라나리드 왕자는 우리의 당은 시리붓의 임명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그것은 그가 당을 위한 봉사뿐만 아니라, 당내 통합을 위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시리붓은 태국으로 도망하던 1996년까지 푼신펙의 총서기직에 있었다그는 귀국시 앞으로는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으나, 위의 임명에서 드러난 것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시하모니 :  1993 헌법에 따르면, 왕위계승의 최종 결정권은 6명으로 구성된 왕위위원회에 있다. 여섯 명은 총리, 국회의장, 명의 국회부의장, 명의 불교 고승 등이다. 위원회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는 자는 당연히 총리인 훈센이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이런저런 형태로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가졌던 라나리드나 짜끄라퐁이나 시리붓에 대해 지지를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훈센은 왕실 가족들에게 정치적 활동에서는 자제해 것을 계속해서 당부했는데, 이것은 한편 탈왕정제에 대한 권고로 해석되어 왕실의 반발을 산다. 그가 1997 3 14 연설에서 시하누크 왕에게 차후 왕족들이 정치에서는 물러나 있도록 왕실을 관리해 것을 요구하자, 심한 불쾌감을 느낀 왕은 퇴위하겠다는 위협으로 대응했다. 훈센의 시각에서 , 왕자들은 국사에 대해 지속적인 간섭을 했으며, 이로써 캄보디아인민당과 푼신펙 간에 충돌 특히 일련의 유혈 사건들이 일어났다. 마침내 1997 7 5~6 훈센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실 출신 적들을 완전히 처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왕자들의 목숨은커녕 그들의 정치적 생명도 불과 개월밖에 붙들어 두지 못했다이상 훈센과 왕자들 간의 관계를 고려하면, 왕위계승의 전망이 가장 밝은 왕자는 라나리드나 시리붓이나 짜끄라퐁이 아니라 시하모니 왕자인 것으로 보인다. 시하모니는 그동안 정치적으로 그다지 오점이 없는 유일한 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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