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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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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1-27 23:21 조회1,6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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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사태>

1. <동티모르 문제>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9년 4월 21-22일 뉴욕에서의 오랜 협상 끝에 동티모르(East Timor)의 미래를 결정지을 동티모르 주민들의 국민투표 실시에 동의했다.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될 선택은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연방 내에서의 자치권을 얻느냐,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느냐의 사이에서 내려져야 한다. 국민투표는 처음에 8월 8일로 잡혔다가 그 뒤 8월말로 연기되었다. 4월 22일의 결정이 내려진 이후 동티모르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격화된 폭력사태가 나타나고 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보고에 의하면, 특히 인도네시아 군부가 후원하는 일단의 민병대가 독립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더욱 격렬히 공격하며 심지어 인권운동단체나 저널리스트와 인도주의 자원봉사자들에게도 위협을 가하고 있다.

2. <동티모르 사태 주요연표>
다음은 동티모르 사태에 관한 주요 역사적 사건들이다.
* 1509년 - 포르투갈인들의 상선이 처음으로 티모르 섬을 방문했다.
* 1642년 - 포르투갈인들이 티모르 섬에 침공하여 백단향(sandalwood) 수집을 위한 무역기지를 세
웠다. 이 시점에 네덜란드인들은 인도네시아의 다른 섬들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하고 있었다.
* 1859년 -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간에 협정이 체결되어 티모르의 동부는 포르투갈령으로, 서부는 네
덜란드령으로 정했다.
* 1942년 - 일본 군대가 동티모르를 침공했다. 격렬한 전투로 6만명 이상의 동티모르인들이 죽었다. 1945년까지의 일본군 점령 기간 동티모르인들의 게릴라 무장투쟁이 비록 소규모이지만 지속되었 다.
* 1945년 - 2차 대전 후 동티모르가 다시 포르투갈의 통치하에 들어가 포르투갈의 "해외 지방" (overseas province)으로 편입되었다.
* 1974년 - 군사쿠데타 후 포르투갈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고,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들에게 독립의 길이 열렸다.
* 1975년
(8월) 포르투갈 식민행정부가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Dili)로부터 철수했다.
(10월) 인도네시아 군대가 동티모르에서 작전 개시하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 5명의 외국인 저널리스트들이 살해당했다.
(11월) 짧은 내전이 있은 다음, 좌익의 프레틸린(Fretilin) 파의 동티모르인들이 동티모르의 독립을 선언했다.
(12월) 미대통령 포드가 자카르타를 방문한 직후, 인도네시아 군대가 동티모르를 공격, 점령했다. 인도네시아는 12월 말 군대를 철수하라는 유엔안보리의 요구를 무시했다.
* 1976년 - 자카르타 정부는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선언했다.
* 1978년 - 호주가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통치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 1989년 -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를 개방된 주로 선언, 거의 모든 여행규제를 해제했다.
* 1991년 - 독립투사를 기념하기 위해 딜리의 산타 크루즈(Santa Cruz) 묘지로 행진하던 군중을 향해 인도네시아 군대가 발포, 약 200명이 사망했다. 산타 크루즈 학살사건은 급진적인 동티모르의 청년들의 독립운동을 다시 촉발했고 동티모르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1992년 - 반란지도자인 사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가 인도네시아 군인들에 체포되었고 인도네시아 법원에서 20년 감옥형을 선고받았다.
* 1996년 - 딜리의 가톨릭 주교인 벨로(Belo)와 망명저항지도자인 호세 라모스 오르타(Jose Ramos Horta)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 1998년 -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하르또(Suharto)가 경제위기와 32년간의 그의 독재에 반대하는 대규모 군중시위에 굴복하여 사임했다. 부통령 하비비(Habibie)가 대통령직을 맡았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상황 변화로 동티모르의 분리독립 요구가 격화되었다.
* 1999년
(1월) 하비비는 갑자기 정책을 바꾸어, 만약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내의 한 자치주로 남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분리를 허락하겠다고 발표했다. 곧 이어 인도네시아 군대의 후원을 받는 동티모르의 親자카르타 민병대들이 국민투표를 부르짖는 동티모르 주민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
(2월) 반란지도자 구스마오의 형집행이 감옥에서 가택연금으로 변경되었다.
(3월)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은 동티모르 주민들이 자치와 독립을 스스로 선택하는 직접선거를 실시하는 데 합의했다.
(4월) 친자카르타 민병대들에 의해 수십명이 살해되었다. 구스마오는 동티모르의 게릴라들과 주민들에게 인도네시아 군대와 친자카르타 민병대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을 명령했다. 나중에 그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6월) 유엔안보리는 동티모르에 유엔 사절단을 파견하여 국민투표 준비작업을 돕도록 했다. 유엔은 친자카르타 세력의 테러행위를 비난했다. 동티모르에서의 법과 질서 유지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인도네시아가 지고 있었다.
(7월) 국민투표를 위한 선거인등록이 시작되었다. 20일만에 40만명 이상의 주민이 등록을 마쳤다.
(8월) 8월 30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동티모르 주민들이 독립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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