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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지역 분리주의 운동과 국가 해체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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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1-27 23:27 조회1,8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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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분리주의 운동과 국가 해체의 위기>

1. 지역 분리주의 운동과 종교 및 종족 갈등
1999년-2000년 사이 인도네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자카르타 정부로부터 완전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 인도네시아 정부뿐만 아니라 아세안의 전역에 걸쳐 차후 인도네시아가 해체되고 그 결과 동남아 전체 지역이 불안해지고 이로써 국제사회로부터의 투자가 막힐 것이라는 우려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움직임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수마트라 섬 서북단에 위치한 아쩨(Aceh)에서의 상황이다. 이 곳에서는 1999년 12월초부터 탈주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탈주는 특히 자바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들은 아쩨에서 약 5%의 인구비율을 갖는 소수민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군 및 경찰력의 가족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아쩨를 떠나고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인도네시아 정부가 파견한 군 및 경찰력과 아쩨의 무장투쟁 단체인 자유아쩨운동(AGAM)간의 잔인한 살육전에서 표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이미 1988년부터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99년 11월부터 아쩨의 다양한 지하운동 조직들이 학교, 관청, 경찰서, 법원 등 공공기관 건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도 아쩨에 주둔하고 있는 군 및 경찰력에 대한 공격을 매우 강화하고 있다. AGAM측은 "우리는 리비아에서 훈련된 병력을 포함하여 잘 무장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를 종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주장한다. 양측간 관계는 아쩨 주민들이 이미 1976년에 미래의 독립일로 삼아 매년 기념행사를 벌리는 12월 4일에 군인과 경찰들이 경축행사에 참가한 현지주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 사건 후 AGAM은 즉시 산하 모든 조직에게 인도네시아 정부의 군 및 경찰병력에 대해 보복을 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39명의 군인과 33명의 경찰이 살해되었고, 4명의 군인과 10명의 경찰이 납치되었다. 부상자는 83명으로 집계되었다.
인도네시아의 두 번째 위기지역은 동부의 말루꾸(Maluku)로, 특히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암본(Ambon)이다. 이 지역에서는 대다수가 기독교도인 현지주민들과 자바에서 온 이주민들간 충돌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그동안 죽은 사람만 적게 잡아도 1,000명이 훨씬 넘는다. 말루꾸 지역에서는 이미 1940년대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기 남부 말루꾸 공화국이라는 독립국이 선포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이 지역에서 독립에 대한 열정이 식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암본에서의 상황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도-무슬림이라는 갈등 구조 때문에 아쩨에서의 문제보다 골머리를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소위 이슬람방어군대(LPI)라고 알려진 이슬람 과격단체의 추종자들이 수도 자카르타에서 그들 신앙의 적대자들에 대한 성전(jihad)을 인도네시아 정부에게 촉구했던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슬람과 기독교간 싸움은 말루꾸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미 롬복(Lombok)에서의 상황도 전반적으로 내전에 가까운 양상으로 발전해나가 있어 통제 불능의 상태에 와 있다.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신자들 상당수는 부통령인 메가와티(Megawati)의 역할에 대해 적지 않은 불신을 품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그녀를 "기독교도의 꼭두각시"로 간주하면서 그녀의 사임을 요구한다. 그와 동시에 대통령인 와히드(Wahid)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외국으로 나들이 가기는 부지런하지만, 국내의 위기국면을 해결하기 위한 책임에는 게으르다고 말한다. 국내에서의 이러한 여론 때문에 인도네시아 정부의 두 책임자는 1999년 12월 중순에 암본을 방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이슬람과 기독교간 충돌은 더욱 심해져갔다. 특히 투입된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이슬람교도들의 편을 들고 있다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양측간 유혈투쟁은 더욱 과격해지기까지 한다.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들에서의 상황은 조금 나은 편이다. 예컨대 싱가포르와 수마트라 사이에 있는 리아우(Riau) 제도와 인도네시아 동부 끝단의 이리안자야(Irian Jaya)의 경우, 분쟁 양상과 분리독립의 열기가 꽤 식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열기가 언제든지 다시 폭발적인 양상을 띨 수 있다는 점에서, 자카르타 정부는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다. 여러 지역들에서의 이러한 유혈충돌과 반정부적인 운동에 대해 인도네시아 국회는 1999년 11월 18일 결의를 통해 더 이상의 분리는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티모르의 분리독립을 어쩔 수 없이 허용했어야 했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다른 지역들에서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국가해체의 양상으로 발전하지나 않을까라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결의에서 인도네시아 국회는 분쟁 지역들, 특히 아쩨와 이리안자야에게 일정한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컨대 재정 부문에서 해당 지역의 총 세입 중 80%까지 지역 자치정부가 보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국가통합을 위협하는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강경한 대응을 불사하겠다는 자세를 나타냈다.

2. 이리안 자야의 분리독립 요구
인도네시아 동쪽 끝에 있는 이리안 자야(Irian Jaya) 주는 2000년도 시작과 더불어 그 공식적 명칭이 파푸아(Papua)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자카르타 정부는 파푸아의 자유파푸아기구(Free Papua Organization)의 대표들과 이 지역의 장래에 대해 대화를 할 용의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유파푸아기구가 그동안 요구해 온 분리독립에 대해서는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파푸아는 West New Guinea라는 명칭으로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다가 1961년 12월 1일에 독립을 선포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수까르노 대통령 정부는 그 선포를 인정하지 않고 1962년 초부터 군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네덜란드에게 파푸아로부터 완전히 손을 떼도록 압박을 가했으며, 네덜란드는 결국 그 해 8월 15일 이 영토를 유엔에게 넘겨주었고, 유엔은 1963년 5월 1일에 5년 내 현지 주민들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할 권리"를 줄 것을 조건으로 인도네시아에게 이양했다. 그러나 자카르타 정부는 그것을 무시하고 파푸아를 인도네시아의 26번째 주로 만들었으며, '이리안 자야'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인도네시아로의 합병은 1969년 유엔에 의해 인정되었다. 자카르타 정부의 경제적 착취 및 정치적, 문화적 정책은 곧 파푸아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1965년 자유파푸아기구의 결성을 가져왔다.

3. 난무하는 폭력: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무질서
1999년 상반기 인도네시아에 대한 세계의 언론은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에서 발생하는 무질서와 내전과 유사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보도로 언제나 채워져 있었다. 종래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우려되어 왔던 동티모르(East Timor)와 이리안 자야(Irian Jaya)의 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뒷전으로 밀려날 정도였다. 새로이 주목되었던 곳은 우선 암본(Ambon) 섬으로, 이 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살고 있는 기독교도들과 새로 이주해 들어온 무슬림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 깔리만딴(Kalimantan)에서는 이 섬의 한 토착 종족집단인 다약(Dayak)족 주민의 한 부분이 마두라(Madura) 섬에서 들어온 이주민들을 적대시하여 역시 충돌이 발생했다.
암본과 깔리만딴의 경우뿐만 아니라 동티모르와 이리안 자야의 사태에서 중시되어야 할 문제는, 비록 대부분의 보도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지역 주민들이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암본은 말루꾸(Maluku) 제도에 속한 섬으로, 이 지역 주민들의 대다수는 1946-1949년간 독립 전쟁시 식민세력인 네덜란드 편에 서서 싸웠으며 그 후 오랜 동안 독립적인 말루꾸 공화국의 건설을 위해 인도네시아에 대항하여 투쟁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다른 섬들 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자바섬의 주민들을 말루꾸 지역으로 이주, 정착시키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트란스미그라시(Transmigrasi) 정책은 말루꾸 주민들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강제적으로 인도네시아에 통합시키려는 시도로 간주되어 왔다. 깔리만딴의 경우에서도 그 배경과 상황전개는 비슷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바 주민들의 반응이라는 문제도 갖고 있다. 자카르타의 시내 중심가에서 분노에 찬 시민 10만여명은 인도네시아의 군인들이 기독교도-무슬림간의 유혈충돌을 진압하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기독교도들에 대해 '지하드' 즉 이슬람 성전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한편 수마트라 섬의 북단에 있는 아쩨(Aceh)에서도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이것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의 인권운동단체인 따폴(TAPOL)의 보고에 따르면, 2월 3일 아쩨의 이디쭛(Idi Cut)이란 지역에서 적어도 50명이 희생된 살육이 행해졌다. 이 날 자카르타로부터의 아쩨 분리독립을 요구한 대중집회에서 군인들이 갑자기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따폴에 의하면 1999년초부터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쩨 주민의 숫자는 100명이 넘는다.

4. 롬복 섬과 발리 섬의 불안한 상황
롬복(Lombok) 섬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무력충돌, 특히 기독교도들과 화인들에 대한 공격으로 사회적 불안이 증대되고 있는 가운데 약 3,000명 정도의 기독교도들과 화인들과 관광객들이 이웃 섬인 발리(Bali)로 도피했다. 그러나 발리 섬에서도 흥분한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기독교도와 화인들에 대한 산발적인 공격을 행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은 보도에 따르면 롬복으로부터 건너온 자들이었다. 전통적으로 관광산업이 발달한 발리의 당국은 관광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조치는 발리 섬의 모든 종교단체들의 대표들과 대화의 채널을 열어 두며,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의 단결에 의지하여 문제의 해결을 마을공동체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을 자위대(pecalang)가 구성되어 외부인들을 통제하며 마을의 질서를 지키고 이를 통해 토착적인 가치와 관습(adat)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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