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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요새화된 미얀마 새 수도 삔머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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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3-17 22:51 조회1,5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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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으로 선출된, 당시 버마로 알려져 있었던 정권으로부터 1962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미얀마의 실권자 (Ne Win)버마식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착수하면서부터 부패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가미된 기괴한 실험들의 연속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심각한 경제난을 초래하였다.

 

게다가, 탓마도(Tatmadaw: 미얀마 군부) 경제 지배는 고위 공무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부정부패를 가능케 했다. 국제투명성기구와 반부패 감시국은 미얀마를 아이티와 공동으로 세계에서 번째로 가장 부패한 국가로 순위에 올렸다. 오직 방글라데시와 아프리카의 차드만이 미얀마보다 하위에 속한다.

 

20세기 중엽만 하더라도 아시아 내에서 가장 좋아질 같았던 얀마 경제가 40 넘게 정체되어 왔다. 실제로 미얀 어린이들의 영양실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민지 시기 바로 직후, 아시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들 중의 하나였던 나라가 지금은 어린이들의 절반 정도를 5 후에는 학교를 그만두게 해야 처지에 놓여 있다

 

인플레이션은 연간 50% 상승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즈, 조류독감, 결핵, 말라리아 발병률의 증가로 인해, 미얀마에서 피난민들이 이웃 국가들로 달아나게 미얀마 사람들은 더욱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다.

 

대부분 학생을 포함하는 데모 시위가 1988년과 1989년에 발생했지만, 군부 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1990 일반 대중의 혐오감을 과소평가한 군사 정권은 놀랍게도 자유선거를 허용했다. 선거에서 미얀마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서 영국과 맞서 싸웠던 게릴라 영웅 아웅 (Aung San)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이끄는 민족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 83% 득표율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선거를 무효화시켰다. 1991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여받은 수지는 이후 가택연금 상태 하에 대부분의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 통치를 회복하고자 했던 노력들은 결국 실패했다.

 

 미얀마 정부는 2002년부터 무기 매입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해군과 공군의 무기들을 업그레이드하고, 병력의 규모를 1998년의 18만에서 오늘날의 39 5천명까지 증강하였다고 런던의 국제전략연구소는 밝혔다.

 

그러나 몇몇 소식통의 추측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중동과 한반도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고, 미국 워싱턴의 관심이 여기에 분산되어 있는 정황 등을 고려할 , 미얀마에 대한 미국의 침공이 임박 해있는 같지는 않고, 다른 그럴 듯한 외부의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정권의 대규모 군사력은 지속적인 반란 폭동에 대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폭동은 소수 민족들이 일으키는 것이다.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이 다수 버마 민족으로부터 잔인하게 억압받는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억압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권에게 1988년부터 1989 사이에 발생한 저항 운동과 1990 선거 결과는 매우 불길한 징조라 하겠다. 바로 여기에 삔머나로 수도를 옮긴 이유에 얽힌 수수께끼와 미얀마의 운명에 대한 중요한 조언들이 자리하게 되었 것이다.

 

최근에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럽에서 부패한 체제를 전복시킨 일종의 피플파워 혁명이 미얀마에서도 반드시 일어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군사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에 성직자-노동자-학생의 동맹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이상 불가능할지 모른다.  

 

삔머나에서 탓마도성벽 더욱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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