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민족주의 역사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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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3-18 17:43 조회1,77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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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3개 주 ‘무슬림 형제’를 놓고 국경을 맞댄 말레이시아와 태국 사이의 총성 없는 전쟁도 꼴사납기는 마찬가지다. “남부 무슬림 분쟁의 해결책은 자치권 부여뿐이다.”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노골적으로 간섭하고 나섰다. “상황을 이해하려면 공부를 더 해라. 태국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이 말레이시아로 가서 군사훈련을 받아온 책임이나 질 일이지.” 탁신 총리도 질세라 맞받아쳤다. 그렇게 설전이 오가는 사이 두 정부 사이에는 메우기 힘든 골이 패었고, 시민들 사이에는 적대감이 쌓였다.
태국의 탐마삿대학 부설 동남아시아연구소 소장 타넷Thanet Aphornsuvan은 “19세기 말부터 태국 정치사가 말레이계 무슬림들을 ‘반역자’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날조해왔다”며 무슬림에 대한 태국 사회의 전통적인 차별과 편견이 역사 왜곡에서 비롯됐음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는 역사를 교육할 때, 남부 무슬림 분리 투쟁은 ‘말레이계 무슬림들이 존재한 적도 없는 빠따니 왕국을 들먹거리며 빠따니, 얄라, 나라티왓을 태국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쳐왔다. 그러니 태국에서 남부 무슬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이들을 만나기란 참으로 ‘하늘의 별따기’가 되고 만다.
그러나 분명한 건, 태국이 자신들 왕조사의 출발점으로 삼는 수코타이 왕국 이전부터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를 잇는 힌두-불교 왕국 스리위자야의 중심지 노릇을 했던 빠따니 왕국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13세기 무렵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여 17세기까지 남중국해를 끼고 빛나는 해양문화를 건설했던 빠따니 왕국은 1563년 미얀마로부터 공격받던 태국 왕국 아유타야를 한때 장악하면서 자신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바로 이 역사 지점이 오늘날까지 태국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잡은 ‘기회주의자 무슬림’을 낳는 도구로 활용됐다. 태국이 늘 빠따니 왕국을 태국의 일부로 표현해왔지만, 빠따니 왕국은 1902년 시암(태국의 옛 이름)이 빠따니 왕국을 강제 합병한 뒤 다시 1909년 말레이반도의 식민 종주국인 영국과 나눠먹기 방콕조약을 통해 태국-말레이시아 국경선을 그어 결국 빠따니 왕국을 지워버리기 전까지는 정치적으로 태국에 복속된 적이 없었다.
그렇게 태국에 합병된 빠따니 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동맹한 태국에 맞서 연합국을 지원함으로써 전후 독립을 보장받았으나, 영국이 약속을 깨고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오늘날까지 태국을 상대로 지난한 분리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니, 태국이 가르쳐온 ‘흉악한’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 투쟁이 남부 무슬림으로 가면 ‘거룩한’ 독립투쟁이 되고 만다.
이렇듯 태국을 낀 동남아시아는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다. 거친 삿대질과 우격다짐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지는 모양새다. 그 모든 천박한 기운은 짐승처럼 혈통을 따지는 ‘인종주의’와 역사적 산물을 왜곡한 ‘민족주의’, 그리고 돈놀이판 ‘애국주의’라는 피투성이 삼형제가 난투극을 벌인 결과다. 그 속에서 아시아 시민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음흉한 새벽을 눈치채지 못한 채, 삼박자 핏빛 행진곡에 덩달이 노릇을 하고 있다.
(정문태. “아시아의 애국주의를 말한다.” 『한겨레21』 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