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인권이 무시되는 미얀마 감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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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3-18 17:36 조회1,62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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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25살이었던 학생운동 지도자 코 초 묘 탄트는 1989년 7월 체포돼 “군사법을 어긴 죄”로 18년 징역을 받았다. 그는 심한 구타를 당해 음식물 소화가 어려웠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1990년 5월 사망했다.
▶ 그리스인과 버마인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제임스 리앤더 레오 니컬스는 해운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1962년 군사 쿠데타로 그의 사업체가 국유화됐는데도 이례적으로 미얀마에 남았다. 그는 1968년 노르웨이 명예영사로, 1978년 덴마크 명예영사로 임명돼 외교사절 임무를 수행했다. 군부는 1993년 그의 외교사절 권한을 박탈했지만 그는 미얀마와 공식 외교관계가 끊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스위스의 실질적인 외교관 역할을 계속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아웅산 수치의 대부이자 친한 친구였고, 수치 여사가 그의 팩스를 사용해 일본의 『每日新聞』 등에 기고문을 보냈다는 것이다.
니컬스는 1996년 4월 5일 정부의 허락 없이 팩스와 전화선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5월 5일 법원은 그에게 징역 3년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그는 6월 20일 감옥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는 65살로 당뇨병과 고혈압, 심장병 등을 앓고 있었지만 그가 정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을 복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부검 당일 양곤의 묘지에 묻혔는데 가족 누구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미얀마 정부는 그가 ‘별 볼일 없는 사기꾼’으로 ‘그에게 어울리는 운명’을 만났다고 그의 삶을 폄하했다.
▶ 30살의 미얀마민족민주동맹 당원인 아웅 흘라잉 윈은 2005년 5월 1일 체포돼 미얀마의 악명높은 군사정보 기관에서 조사를 받았다. 9일 뒤 그의 가족은 그가 심문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주검을 조사한 의사는 구타로 인한 상처와 부러진 갈비뼈 세 대, 멍든 심장과 부어오른 목, 내장 염증 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군사정보 기관은 그의 주검을 가족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서둘러 화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