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건국 50주년을 맞이한 말레이시아 - 아시아의 인종 용광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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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3-18 20:31 조회1,57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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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주년을 맞이한 말레이시아와 관련하여 또 다른 잘 알려진 섬뜩한 주제가 있다. 독립 전에는 비말레이 이민들에게 말라야 시민권을 부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결국 말레이인들에게 이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결코 주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헌법으로 보장한 후에야 비말레이인들은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건국 50주년을 맞이하여 이제는 논쟁의 주제가 바뀌었다. 많은 비말레이인들은 그 국민을 인종에 따라 분류하고 종족에 따라 국민을 달리 취급하지만 국기에 대해서는 국민이 다 함께 환호하기를 요구하는 나라에서 과연 애국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통합과 평등>
말레이시아의 여당인 암노UMNO 내부에서는 말레이인들이 딴 마음을 품고 있던 영국인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독립을 쟁취했다고 이야기하는 자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독립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자로 생존해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는 말레이인이 아니라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다. 말라야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친펭Chin Peng은 말라야의 독립을 위해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싸웠다. 그는 5천 내지는 1만 명의 무장 게릴라와 함께 수 만 명의 영연방 군대의 발을 묶어 놓았다.
말라야대학교의 역사학 명예교수인 쿠카이킴Khoo Khai Kim은 “만약 1950년대 고무와 주석 가격이 폭등하지 않았더라면, 영국인들은 친펭 부대와 싸울 형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영국인들이 결국 사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도록 마음을 먹게 된 것은 공산주의자들 덕분이었다.
말레이반도의 세 주요 민족들을 대표하는 정당인 말레이계 암노UMNO, 말라야 중국인 협회Malayan Chinese Association (MCA), 말라야 인도인 회의Malayan Indian Congress(MIC) 사이에 동맹 관계가 결성되어 1955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호소는 그 이후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영국인들이 바랐던 바로, 그들은 이처럼 통합된 세력과 협상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세 당의 동맹이 이후 말레이시아를 지배해 왔다. 바로 여기에 메르데카의 교훈이 있다. 즉 말레이시아인들이 서호 힘을 합쳐 한 국민으로 행동하면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지만, 분산되면 실패한다는 것이다. 만약 말레이시아의 지도자들이 위협과 차별 대우와 강압을 통해서는 통합이 이룩되지 않고 평등과 상호 존중을 통해서만 그것이 성취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말레이시아의 영광스러운 100주년 기념을 위한 토대를 지금 놓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