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태국의 역사 왜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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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3-18 17:47 조회1,71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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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2003년 1월 29일 불길에 휩싸인 프놈펜의 태국 대사관)
2003년 1월29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불길에 휩싸인 태국 대사관은 그동안 캄보디아 사람들의 가슴에 맺혔던 태국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준 상징적인 풍경이었다. 그 폭동은 캄보디아에 수많은 팬을 거느린 한 타이 여배우가 “앙코르와트를 태국에 넘겨줄 때까지는 절대로 캄보디아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떠벌였다”는 소문에서 비롯됐다. 그러자 놀란 여배우가 “죽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는데, 이후 그 폭동이 일어나기 2년 전쯤 그가 한 방송 드라마에서 그런 대사를 읊었던 게 와전된 것으로 드러났다.
19세기 타이 민족 형성 연구에 정통한 통차이 교수는 “이런 일들은 근대에 들어 태국이 과도한 민족주의를 내걸고 국민들에게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믿을 수 없는 이웃’으로, 라오스를 ‘불쌍한 형제’로, 그리고 미얀마를 ‘못된 적’으로 여기도록 만들면서부터 이미 예견됐다”고 진단했다.
이번엔 라오스 쪽으로 넘어가보자. 역사적으로 타이인들은 라오스를 ‘농 라오Nong Lao’(동생 라오스)라 불러왔는데, 이는 라오스를 시암Siam(태국의 옛 이름)의 은혜를 입은 신하쯤으로 여기면서 비롯된 정서다. 물론 이는 라오스 쪽에서 보면 당치도 않는 말이 된다. “시암은 라오스 사람들을 노예로 여겨 신분을 구분하고자 문신을 새긴 가혹한 박해자다.”
두 나라 사이의 논쟁과 충돌은 비엔티안의 아누웡Anouwong 왕이 주제로 떠오르면 극에 달한다. 태국판 역사는 이렇다. “1779년 시암이 라오스를 공격했을 때 비엔티안 마지막 왕의 아들이었던 아누웡을 전쟁포로로 잡아왔다. 이어 1804년 아누웡은 방콕 법정에서 시암의 속국인 라오스를 통치할 왕으로 지명됐다. 아누웡은 시암에 충성을 다하지만 전쟁에서 잡혀온 라오스 사람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요구를 라마 3세Rama III가 거부하자 변하게 된다. 아누웡은 자신의 요구가 묵살당하자 1826년 라오스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던 태국 동북부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그 뒤 베트남으로 도망친 아누웡을 1829년 타이 군이 방콕으로 압송해와 처형한다.”
이 역사 이야기에서 타이 학생들은 또 하나 거대한 ‘여걸’을 알게 된다. 이름하여 타오 수라나리Tao Suranaree. 1820년대 코랏Khorat 부지사의 부인이었던 그녀는 수많은 여성들을 동원해 반란자인 라오스 군인들에게 술을 진탕 먹여 곯아떨어지게 한 뒤 그 틈을 타 잽싸게 공격해 반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다.
자, 이와 같은 이야기가 메콩강을 끼고 살아온 라오스 역사에서는 어떻게 기술돼 있을까? 태국이 기술한 아누웡 왕에 대한 역사와 정반대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타이 역사가 아누웡 왕에게 시암의 인자함을 받아들이지 않은 ‘반역자’ 꼬리표를 달았다면, 라오스 역사는 그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민족 영웅’으로 모셔왔다.
그러니 아누웡 왕의 행위가 태국에서는 ‘반란’으로, 라오스에서는 ‘독립전쟁’으로 엄청난 개념 차이를 보일 수밖에. 물론 여걸 타오 수라나리 이야기는 라오스 역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두 나라는 아누웡 왕 이야기를 현실 속에서 민족주의 광고용으로 활용해왔다. 라오스는 1984년 태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재깍 아누웡 왕 전기를 출판해 국민에게 읽히며 젊은이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했다. 태국은 이에 맞서 1년 뒤인 1985년 라오스가 혁명 3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자, 그들의 코앞인 메콩강가에서 여걸 수라나리를 추모하는 대형 행사를 열어 불타는 민족주의 근성을 드러냈다.
2001년 태국이 이 여걸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발표해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만약 그 필름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우린 확실하게 반격할 것이다.” 히암 폼마찬Hiem Phommachanh 방콕 주재 라오스 대사는 일전 불사를 다짐했다. 영화 한편을 놓고 이웃 나라끼리 만들 수 있는 풍경치고는 지나치지 않는가? 그러나 이는 영화 속의 장면이 아니라 현실이다. (태국의 The Nation지의 Pennapa Hongtong 기자의 글. 『한겨레21』 564호, 2005년 6월 16일 번역본 일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