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지배 엘리트층의 속임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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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3-18 17:27 조회1,70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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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금 수혜에 있어 노골적으로 편견을 드러낸 것보다 더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사실은 각 정부 부처들과 법조계 그리고 공기업들이 장학금 지원자를 모집하는 광고에 자금을 투자했다는 사실이다. 장학금에 뽑힌 30여명의 학자들은 사진이나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의심할 여지없이 그 모두가 명백한 중국인들이었다. 이를 근거로 볼 때, 정부 및 정부 관련 큰 규모의 장학금을 수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일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말레이인이 싱가포르 군 해외장학금 수혜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고, 싱가포르 군 공로장학금은 거의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여기서 특별히 언급될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 군의 고위직과 극히 신중을 요하는 직위에 말레이인들이 지원하면 공식적으로 제재를 받는데, 이것은 그들에 대한 차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레이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은 국회와 대중매체를 통해서 논의되어 왔다. 말레이인들은 무슬림이고 또한 이들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사는 말레이계와 민족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동족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말레이인들의 싱가포르에 대한 충성심을 보장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들에 대한 차별이 합리화되었다. 현 리셴룽 총리는 이 차별정책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로 자리매김해 왔다.
이러한 인종 차별은 말레이인 남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는데, 첫째는 차별로 인해 군대 내에서 장래성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잠재적으로 싱가포르 군을 통해 학자 계층에 들어가고자 하는 높은 포부를 가진 말레이인들 모두를 완벽하게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인 여성이 말레이인 남성보다 싱가포르 군 장학금을 수여받을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러나 싱가포르 교육제도는 심지어 이 장학금 제도 전전 단계인 취학 전 교육부터 중국인을 편애하는 정책을 교묘하게 마련해 왔다. 바로 여기에 비중국인들에 대한 싱가포르의 국가 차원의 차별의 핵심이 자리잡고 있다. 1970년대 말부터, “능력위주 사회” 원칙과 “다인종주의”의 원칙들은 소수민족을 멸시하는 정부 주도의 중국인 중심적인 쇼비니즘으로 인해 그 원래의 색채를 차츰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 사실이 싱가포르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1978년 리콴유 전 총리가 해외의 정부 고위인사들과 만나는 공식석상에서 싱가포르를 “유교사회”라고 일컫기 시작했다. 이는 리콴유 전 총리가 궁극에는 중국인 주도의 싱가포르 정부 형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으로 향하며, 공동체의 중립적인 다인종주의라는 형태를 지지하는 옹호자로서의 그의 경력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초기에 표면상에 나타난 중국화 과정 프로그램의 조짐으로, 중국 표준어와 영어를 말할 능력을 가진 엘리트들을 창출해 내기 위한 공공연하고도 성공적인 노력 차원에서, 한자 교육과 중국어 및 선택적으로 엄선된 “중국의 가치”에 특권이 부여되었다. 이 캠페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강령이 1979년에 제정되었다. 그것은 바로 매년 “중국 표준어 말하기 운동”을 벌이는 것과 ‘특별지원 계획’ 학교로 알려진 엘리트 중등 화인학교들을 보존하고 양육한다는 결정이었다.
특별지원계획 학교들은 중국 외계, 중국풍 정원, 이화(李花) 모양의 창문, 중국 오케스트라와 드라마, 그리고 중국과 대만과의 교환 프로그램 등이 마련되도록 고안되었다. 수년 동안 특별지원 계획 학교 학생들은 다른 보통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보다 고급스러운 취학 이전 프로그램과 특별한 대학 이전 장학금을 수혜할 수 있는 등 많은 특혜를 받아 왔다.
예를 들어 영어교사들이 부족했던 1980년대 초기에도 교육부에서는 특별지원 계획 학교에 재학 중인 중산층 중국계 학생들이 다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그들의 영어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충분한 영어교사들을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또 이 학생들이 2년제 대학에 지원할 때, (대학자격공통시험에서) 2개의 보통급 성적O-level을 추가로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인도계 학생들이나 말레이계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특별한 조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각 학교에서 개별적으로 특별한 조치를 낼 것이라는 정도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돌봐야만 했을 뿐 아니라 교육에 부적합한 선생들, 기준 이하의 시설과 자원 또 중국인만큼 깊지 않은 “지식”을 수학해야 하는 등 가끔은 잔인하게 방치되는 대상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