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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베트남한인회 전영상 회장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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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1-26 23:22 조회6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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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베트남한인회 전영상 회장에 대한 회고

김기태(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명예교수)

주 베트남 전 한인회장 전영상 옹이 88세로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San Jose) 양로원에서 타계했다. 전 옹은 노환으로 몸이 불편하고 오래 전에 아내를 잃고 외롭게 살면서도 2년 전부터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그는 전화로 이 책이 꼭 출판되도록 도와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전 옹이 다니던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이 책자가 나와 다행이다. 그는 책에서 20여년의 베트남 생활과 1975년 베트남의 공산화로 17년간 고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1993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미국에서의 봉사활동을 적고 있다. 그의 베트남에 대한 기록은 1975년 이전 격동과 혼란 속에서 생활했던 한국인의 산 역사이다.
그의 한 생애는 우리민족의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운명을 갖고 이 세상에 온 것 같다. 1960년대 한국군이 베트남에 참전하자 한국의 수많은 용병업체들이 군 특수붐을 타고 베트남에 진출했다. 전 옹은 한인회회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하면서 한국인들의 어려운 일들을 민간인 차원에서 도와주었다. 1975년 한국에 이주한 이후에도 한국 내에 있던 베트남인들의 정착을 위해 힘 자라는 데까지 도와주었고 1994년 미국에 이민가서도 우리나라 저소득층 노인들의 의료지원을 위한 봉사활동을 했다. 이러한 그의 공로로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많은 표창장과 감사패를 받았다.
나와 전 옹과의 인연은 필자가 1968년 베트남 사이공에서 공부할 때 일요한글학교에서 우리 교포 2세에게 한글교육을 시키면서였다. 베트남 공산화 이후 한국으로 피난온 다음 전 옹이 부산에서 부인과 같이 대우실업에서 일할 때 잠시 만난 적이 있다. 전 옹이 미국으로 이민 가서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에 살고 있을 때였다. 내가 1998년 “1945년 전후의 베트남 한인”에 대한 글을 쓸 때 전 옹을 비롯한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던 토니 남궁 씨를 인터뷰하도록 도와주었다. 전 옹의 회고록 『길 따라 세월 따라』를 중심으로 그의 봉사의 삶을 살펴본다.

베트남과의 인연

전 옹은 1922년 말 홍콩에서 인삼 도매업을 하는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형과 같이 홍콩에 잠시 머문 다음 1928년 6살의 어린 나이로 귀국하여 외가에서 자랐다. 1933년 아버지가 베트남 하이퐁으로 이사한 다음 그는 14살 때인 1937년 3월에 하이퐁으로 갔다. 당시 하이퐁에는 한국인이 2세대 살고 있었다.
1940년 일본군이 베트남에 진주하자 아버지는 베트남을 철수했고 이듬해에 다시 하이퐁으로 돌아간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하이퐁으로 돌아갔다. 전 옹은 일본어-베트남어 통역으로 일했고 북한에 남아있던 어머니와는 1944년부터 연락이 끊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9월2일 호찌민이 영도하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전 옹은 베트남 내의 우리 교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교민회를 설립하고 당시 우리 교포인 전성화 씨를 회장에 추대했다.

가족의 비극

1945년 말경 26세로 두 자녀를 둔 전 옹의 형은 프랑스 사람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호찌민 정권에 의해 체포된 다음 행방불명이 되었고 정세의 불안으로 아버지의 사업도 중단되었다. 1945년 10월경 아버지가 그동안 모은 재산과 집이 몰수되었다.
1946년 프랑스 군의 공격으로 수도 하노이에서 베트남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전 옹은 투옥되었다. 감옥에는 우리나라 사람인 김찬길, 전완용씨 등을 만났으나 이들 두 사람은 어느 날 불려나간 후 처형된 것이 틀림없었다. 전 옹 역시 피살 직전에 아는 사람의 배려로 죽음을 면했고 10개월 뒤 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전 옹은 하노이로 올라와 소규모 운수업을 시작했다. 1948년 9월 3일 아버지가 운전하던 중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아버지의 나이는 53세였다.
한국에서 6.25동란 기간인 1952년 미군기가 고향인 평안북도 삭주를 폭격한 후 1944년부터 연락이 끊어진 어머니와 여섯 형제들은 미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남베트남으로의 이주와 교민 봉사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해 80만명의 베트남인들과 같이 우리 교포들은 모두 남으로 내려왔다. 전 옹은 사이공에서 운수사업을 계속하다가 곧 운수사업을 접고 당시 우리 교포 김태성씨가 운영하는 고철 수출회사인 신흥양행에 입사했다.
1958년 교포 김종범씨(후에 베트남 군 대위)의 소개로 35세 때 부인과 결혼했다. 고국에 돌아가 한국 여인과 결혼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키느라 결혼이 늦었던 것이다. 1961년 12월 9일 딸 남희(1981년 미국으로 이민)가 태어났다.
당시 교민회장으로 있던 신흥양행의 김태성 사장이 1961년 초에 귀국한 후 2년 동안 돌아오지 않자 1964년 임시총회에서 새로운 회장단이 선출되었고 전 옹은 이때부터 교민회와 관계했다. 그는 1967년 교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이듬해에 회장에 취임하여 1974년까지 7년간 회장으로 일하면서 우리 교포를 위해 헌신했다.
베트남 정부에 대한 한국의 지원으로 1964년 45명으로 구성된 태권도 교관단(단장 남태희 소령)이 파견되어 베트남군 장교들의 태권도 교육을 지도하는데 전 옹이 통역을 맡았다. 곧 이어 건설 공병대(비둘기부대)와 1965년부터 한국 전투부대가 파병되었고, 사이공의 차이나타운 쩌런(Cholon)에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이와 동시에 베트남전 특수 붐을 타고 많은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했다.
전 옹은 당시 베트남 공군사령관으로 있다가 베트남 정부 부통령이 된 응엔까오끼(Nguyen Cao Ky)와 하노이에서 학교를 같이 다닌 친분으로 대사관에서 해결할 수 없던 어려운 영사 문제들을 해결해주었다. 1968년경부터 우리나라 기술자들의 베트남 불법체재 문제는 심각했다. 전 옹이 우리나라 근로자들을 도와준 사건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교민회관 건립과 일요한글학교

사이공(지금 호찌민 시)에 있던 우리 교민들은 남베트남 전역에 걸친 베트콩의 전면적인 총공격인 1968년 구정공세 이후 대사관(호찌민 총영사관) 구내 별관에 교민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한글학교를 열었다. 어린 학생들은 모두 1945년 이전에 이곳에 정착한 교포들의 2세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공부하러 올 때마다 식품과 교통비를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서 지원해 주었다. 나는 1968년 사이공대학교 문과대학(지금 호찌민 인문사회과학대학)에 재학하면서 이들 2세들의 한국어 교육을 위한 일요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추억은 잊을 수가 없다.
전영상 옹이 우리나라 교포를 위해 남긴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교민회관의 건립이다. 1968년 한인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교민들의 숙원사업인 재월 한국교민회관 건립계획을 수립하고 모금운동을 벌인 공로 때문이었다. 1969년부터 전 옹은 교민회 설립을 위한 4단계 계획을 수립하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주월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 주 베트남 신상철 대사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1967년에 베트남 경제사절단 통역의 자격으로 전 옹은 25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한국 정부로부터 교민회관 건축 지원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또한 1971년 대통령 취임식에 부인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계기로 서울, 인천, 부산 등지를 다니며 기업체에 자재지원을 요청했다. 국방부를 방문하여 자재수송 약속을 받았다.
전 옹은 사이공 중심지에 있는 대지를 물색하고 자금을 동원하여 1969년에 화교 소유의 대지를 구입했다. 베트남 부동산법에 외국인 명의로 부동산 등록이 불가능하여 대사관 명의로 등록을 했다. 매입한 대지는 560㎡로, 학교는 2층 건물로 설계되었다.
전 옹은 1971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기회에 한국정부와 기업체 그리고 국방부를 찾아가 건축자재의 기증과 수송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기초골조공사는 한국군 건설지원단(비둘기 부대) 2개중대가 1972년 11월에 착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내부공사는 베트남 건설회사에 맡겼다 1973년 5월 2층의 재월 한국교민회관이 준공되었다.
1973년 1월 파리협정에 따라 한국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1974년에 전 옹이 다시 교민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주 베트남 유양수 대사는 교민회 회장단에게 교민회 총무로 사이공연합 교회 김영광목사를 총무로 임명하라고 요청했다. 이를 거절하자 1974년 11월경 연합교회 김목사와 베트남 진출 군납업체 사장들이 대사관의 지원으로 교민회관을 강제로 점령했다. 전 옹은 교민회장 임기를 명예롭지 못하게 그만두고 이 사건 이후부터 교민회와 대사관과 관계를 끊었다.
베트남 공산정권과 한국의 외교관계가 1992년 다시 수립되었다. 한국외국어대학 재단에서는 이 교민회관을 한국문화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4층으로 증축했다고 한다.

베트남 탈출과 난민수용소

전 옹은 베트남에서 생활하던 중 세 차례 고국을 방문했다. 1975년에 들어오면서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강화되어 남베트남 정부는 패망 일보직전이었다. 전 옹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전 옹이 교민회관 문제로 대사관과 관계를 끊은 지 3개월이 지난 1975년 초 당시 주 베트남 김영관 대사는 전 옹을 대사관 자문의원으로 위촉하고 교민들의 철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우리 교민들의 철수를 위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책에서 베트남에서의 우리 교민들의 당시 철수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교포 철수를 돕기 위한 구호품을 실은 2척의 해군함정이 사이공 부두에 정박하고 있었다. 전 옹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공산화 직전인 1975년 4월 26일 20년간 생활 기반을 닦았던 사이공을 떠났다. 그는 우리나라 LST해군815함(함장 권상호 대령)을 타고 난민의 신분으로 고국으로 향했다.
전 옹은 1,200명을 태운 해군 함정이 1975년 5월 13일 부산항에 도착할 때까지 17일 동안 선상에서 주로 베트남 여인들을 위해 봉사했다. 부산 대신동에 위치한 난민보호소에서 전 옹은 잠시 자치회장으로 일했다. 1975년 9월 15일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신축건물로 옮겼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생활

1976년 전 옹은 난민수용소를 나와 지인들에게 직장을 부탁했다. 다행히 박영수 부산시장의 소개로 부산시 동래구에 있는 대우실업 부산공장에 취직이 되었다. 당시 전 옹의 나이 54세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는 국내에 있는 베트남 여성들을 도왔다. 1988년 12월 대우실업에서 퇴사할 때까지 열심히 돈을 모아 집을 장만했다. 딸 남희는 198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전 옹은 한국-베트남 수교 전인 1990년 2월 한국에 정착한지 15년 만에 65세의 나이에 아내와 같이 공산화된 호찌민시를 2주 동안 방문했고 그후 1991년, 1992년 여러 차례 베트남으로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체의 통역으로 베트남을 드나들었다.
1993년 초 딸 남희로부터 부모를 미국이민 초청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민 가기 전인 1993년 9월 전 옹은 부인과 같이 미국을 방문하여 8년만에 딸을 만났다. 그때 자기를 중매해준 베트남 교포 김종범씨를 17년만에 만났다. 김종범씨의 권고로 그리고 하나뿐인 딸 곁에 살기 위해 그 이듬해에 한국에 있는 재산을 정리하고 미국 이민을 떠났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1994년 정착한 전 옹은 그곳에 있는 한미봉사회란 한인 단체를 통해 한인들을 위해 봉사했다. 주로 저소득층 한인들을 위해 베트남계 병원들과 연결해주는 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600건 이상의 의료 통역자원봉사를 했고 이러한 그의 공로로 산호세주니어리그란 단체에서 자원봉사자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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