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서의 한국 어머니들의 조기유학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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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작성일24-01-26 23:20 조회60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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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서의 한국 어머니들의 조기유학 열풍
홍석준(목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최근 한국사회에서 자녀 교육을 위해 부부가 초국적인 상황에서 별거를 마다하지 않고 헤어져 살면서 남편은 한국에 남아 돈을 송금하고 아내는 자녀들과 함께 외국에서 체류하면서 자녀들의 조기유학을 돕는, 소위 ‘기러기가족’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이미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한국의 이러한 ‘기러기가족’은 ‘신글로벌 가족’으로서, 남편은 한국에 남고 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조기유학을 위해 외국으로 떠난다는 점에서 종전의 ‘생계형 글로벌 가족’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현저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은 한국에 남고 아내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자녀를 데리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 한국의 ‘기러기가족’이 말레이시아에 속속 입국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유명한 암팡(Ampang)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 ‘기러기가족’의 경우, 90% 이상이 어머니와 자녀가 사는 ‘모자가정’이다. 한국 어머니들이 남편과의 별거를 감수하면서까지 자녀들을 데리고 말레이시아를 찾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1990년대 중후반부터 말레이시아는 새로운 조기유학 대상지로 한국 어머니들에게 선호 국가로 부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광을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유학 대상지로서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교육여건을 지닌 나라’라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심지어 영국, 뉴질랜드, 호주 등과 같은 나라로 조기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 말레이시아로 유학지를 변경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참고로, 실제 2005년도만 하더라도,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국가로 조기유학을 떠난 청소년은 약 11.4%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2008년도 10월 통계청이 발표한 '2007학년도 초중고 유학생 통계'에서는 전체 초중고 출국자수(해외 이주, 부모 파견 동행 포함)중 미국 출국자가 1만4,006명(32.3%)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가 7,421명(17.1%)으로 뒤를 이었다. 중국은 6,880명으로 3위를 차지함으로써, 캐나다(5,453명), 호주(2,030명), 뉴질랜드(1,833명)보다 앞섰다. 즉, 불과 2, 3년 사이에 동남아시아로의 유학 선호 현상이 두드러진 것이다.
말레이시아가 한국 어머니들의 조기유학 대상지로 선호되고 있는 주요 이유는 우선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과 같은 선진국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비에 다닐 수 있는 미국, 영국 및 호주 계통의 국제학교가 많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30개가 넘는 국제학교에 10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유학 온 5만여 명의 학생들이 이처럼 다양한 국제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한국 학생들의 비율은 전체 외국인 학생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 국제학교에 개설된 영어특별반(IEP: Intensive English Program)이라 불리는 준비반의 경우 80% 이상이 한국 학생들로 알려져 있다. 등하교 때 모습을 보면 마치 한국 학교를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 학생의 비율이 높은 국제학교 역시 최근에 급속히 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국제학교에 다니는 한국 학생들은 2009년 현재 이미 5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거의 매주 마다 초중고 학생 자녀들을 동반한 한국 어머니들이 속속 말레이시아에 도착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한인사회’도 팽창되고 그 구성원은 점점 젊어지며, 이들의 자영업 형태와 업종도 점차 다양하게 확대되어 가고 있다. 현재 2만여 명인 한인의 규모가 요즘 같은 증가추세로는 머지않아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말레이시아에서는 전 인구의 약 25%를 차지하는 화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암팡 지역(Ampang Area)의 암팡 에비뉴(Ampang Avenue)와 파위나 코트(Fawina Court), 스리 암팡(Sri Ampang), 암팡 우타마(Ampang Utama) 등 같은 대형 콘도미니엄들에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비율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다. 말레이시아 현지에서는 한국 어머니들이 조기유학을 목적으로 말레이시아에 지속적으로 입국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콘도미니엄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진정한 아시아’(Truly Asia)라 불리는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인, 화인, 인도인 등 2천 7백만의 인구가 화합을 이루며 살고 있는 다민족국가이자 다문화사회이다. 이슬람교가 말레이시아의 공식 종교이긴 하지만 헌법의 보호 하에 기독교, 힌두교, 불교 및 다른 종교들도 자유롭게 숭배된다. 이런 이유로 말레이시아는 전 세계의 다민족국가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평화로운 국가로서의 인식과 인정을 받고 있다. 공부, 일 또는 사업을 하기 위해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말레이시아의 국어는 말레이어(Bahasa Melayu)이지만,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고, 중국어(Mandarin), 타밀어(Tamil)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말레이시아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생활비 및 학비, 그리고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습득할 수 있다는 언어문화적 환경의 장점, 지리적으로 한국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영어권’에 속한 나라라는 점, 치안이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이슬람을 신봉하는 말레이인이 총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세속적인 문화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가 있는 ‘깨끗하고 건전한’ 사회라는 인식, 인종차별이 덜하고, 한국인들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장점 등이 작용하여 새로운 조기유학 대상지로 부상하였다. 물론 흔히 망글리시(Manglish: 말레이시아 잉글리시를 줄여서 만들어낸 조어로, 말레이어 식의 영어를 일컫는다)로 인한 영어 발음의 문제, 말레이시아 자체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 부재 또는 부족, 말레이시아의 후진국 이미지 등이 말레이시아 행을 꺼리게 한 것이 사실이지만, 친지나 지인들의 소개 또는 회사 동료의 권유, 인터넷 정보, 말레이시아와의 개인적 인연 등의 이유로 말레이시아를 선택하였다.
사실 자기 자녀들의 조기유학 결정 이전에 한국 어머니들에게 말레이시아의 교육체계에 대한 정보와 관심은 매우 일천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입장에서 교육 분야는 다문화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고 국가통합을 위한 효과적인 교육 내용의 전수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업 또는 산업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한국 어머니들의 관심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보조차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막연한 기대와 무지의 상황이 서로 결합된 상태에서 유학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의 신 중산층의 출현은 영어 사용의 강화를 필두로 하여 영어 교육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어서 한국 어머니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교육 분야에서 경쟁력이 있고 뛰어난 품질의 전문적이고 특화된 과정뿐 아니라 다양한 고등 교육 과정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선전, 홍보하고 있다. 이것의 근본적인 토대는 영국과 호주의 유명 대학들이 현지에 분교 캠퍼스를 만들고 있는 현재의 경향에서 엿볼 수 있으며,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독일 및 뉴질랜드의 대학들은 말레이시아 교육기관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트위닝 프로그램(twinning program)이라 불리는 편입 제도 및 외국 대학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그 대학의 학위 프로그램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개발된다. 말레이시아 교육체계의 이러한 특징은 말레이시아가 한국인들의 새로운 조기유학 대상지로 부상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글로벌화의 진전에 따라 오늘날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는 지리적 공간이 정체성과 일상생활의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 그들은 대신에 사회적, 직업적, 이념적 공통점들로 연결된 ‘초국가적 가족’과 같은 ‘탈지역화된 공동체’에 진입한다. 글로벌화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정신적 분산은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체험이 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에 조기유학 온 한국 어머니들의 일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새로운 민족국가 개념에 근거한 ‘초국적 가족’과 ‘신글로벌 가족’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초국가적인 이민자들의 정체성이 아직 민족 개념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에, 말레이시아 내의 ‘한인사회’라는 공감대는 고국의 지리적 공간 대신, 말레이시아 사회 내에서 겪었던 차별의 공동 경험에 입각해 있다. ‘한인사회’의 문화는 말레이시아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대항문화’인 동시에 영어권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 어머니들의 조기유학을 위한 이러한 이주 체험은 그들의 시간감각을 구체적으로 변화시켰다. 종종 한국 어머니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살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계절이 어떻게 바뀌고, 나이를 어떻게 먹는지를 잊는다고 한다. ‘가족’을 떠나 ‘기러기가족’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이주자들로서 한국 어머니들에게 시간은 직선이나 선형이 아니라 나선이나 방사선형으로 체험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시간과는 다른 성격과 의미를 지닌 시간을 체험하고 있으며, 이러한 체험은 그들의 욕망과 결합하여 한국 생활에 대한 향수와 망각하고 싶은 욕망, 금의환향하고 싶은 욕망과 귀환 불가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 사이의 이중주를 통해 ‘춤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레이시아를 조기유학 대상지로 선택하여 자녀와 함께 조기유학의 길을 찾아 나선 한국 어머니들은 중산층의 의식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외국생활’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기러기가족’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레이시아 현지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고향을 상실하고 새로운 고향을 창조하길 욕망하는 특권층’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들에게 삶의 거점으로서의 국가 개념은 예전에 비해 점차 그 중요성을 상실해 가면서 새로운 의미로 전환되고 있는 기로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욕망 속에는 한국의 기존 질서에 저항이나 반항은 아닐지라도 탈출과 일탈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잔존해 있다. 어떤 측면에서 조기유학은 불행한 현실을 탈출하기 위한 구실이나 수단이었는지 모른다.
말레이시아에서 그들의 ‘탈주의 욕망’은 가족 간 불화라는 장애물을 안고 시작된 것이며, 조기유학의 아이들 미래를 담보하고 있는 ‘위험한 상상’일 수 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의 일상을 자녀들의 유학 생활을 때로는 주도적으로 관리하고, 때로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들의 욕망은 ‘사회화’하여 재현된다. 무릇 문화적 재현은 매우 이질적이고 모순적이며 정치적, 경제적 세력의 이해관계의 역학에 따라 중층적이면서 다면적 성격을 지니는 법이다.
한국의 가부장적인 가족 시스템, 남편과의 문화적 코드 차이로 인한 갈등, 시댁과의 심리적, 정서적 갈등, 흔히 교육열로 표현되는, 아이들의 영어 교육에 대한 과도하리만치 집요한 열망, 주부로서의 자경심(self-esteem)과 콤플렉스의 이중적 변주 속에 숨겨진 자유를 향한 갈망 등은 말레이시아에서 외톨이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 자녀들이 학교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쳐주길 바라는 기대와 희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진자 운동을 계속한다.
영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막혔을 때의 막막함과 어디 숨을 곳이라도 있으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의 모멸감에 가까운 창피함, 하고 싶은 말이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데,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이를 꾹꾹 눌러 참아야 했던 잊지 못할 경험들은 한국 사회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이나 자유로움을 향한 비상구를 발견했다는 즐거움과 함께 말레이시아에서의 일상생활의 소외감이나 정처 없어 떠도는 집시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는 느낌, 그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한 지난한 추구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불어 닥친 글로벌 차원의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조기유학 대상지로서의 말레이시아에 대한 한국 어머니들의 관심과 욕망이 급속히 위축되거나 소멸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서남포럼뉴스레터, 2009.10.12 게재된 글로, 필자의 허락하에 전재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