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선교이야기1: 섬에 살으리랏다.

번호

222

 

작성자

한배임()

작성일

2016-01-28 15: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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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칼럼 117호(2016/1/21)

선교이야기1: 섬에 살으리랏다.

노랗게 물든 감귤밭 사이사이로 하얀 눈발이 흩날리던 12월 어느 오후, 교회사역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 전화선위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신학교 한 모임에서 일년 반정도 활동을 같이하고 선교에 헌신했던 전도사님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이듬해 말레이시아에 싱글로 파송을 받기 위해 파송교회가 있었던 제주도에 내려와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다. 서울에 계시는 몇 분외엔 파송교회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터라 전화벨에 다소 놀랬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남편이 된 그 전도사는 잠깐 방문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제주도를 내려왔는데 성탄카드 겸 청혼카드를 가지고 왔다. 잠시 내게 대혼란이 왔다. 순간 너무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하나님, 총회, 노회, 파송교회, 교인, 선교지인 말레이시아 동역자 등... 이분들과 약속한 것을 어겨야 하는 문제와 며칠간 투쟁을 했어야 했다. 결국 기도 끝에 나의 소명과 같이 갈 이 남성에게 나의 삶을 맡겨 보기로 결심했다.

청혼의 내용인즉 이러하다. "금 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리~, 곧 나사렛 예수!" 그리고 “선교지로 가기 전 무교회 섬에 가서 선교지가 어떤 곳인지 미리 한국에서 경험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3년을 무교회 섬에서 사역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이미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던 교회도 사임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집도 돈도 없고, 예수밖에 없으니 결혼을 하더라도 쉽지는 않을 테니 그래도 괜찮다면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상관없다”는 뭐 이런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 예수는 내게도 있으니 금 덩어리나 아님 집이라도 좀 준비해 오라고 할 걸 그랬다. 근데 문제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게 보여버렸다. 반포에 그 좋은 교회도 사임하고 복음을 위해 오지를 택했던 그 마음이 내 눈에 콩깍지를 씌우게 만들었다. 그 얼굴은 백마 탄 왕자님보다 더 하얗게 보였고 키는 180정도로 보였으며 어려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해 생긴 턱 밑에 흉한 흉터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지금은 그 흉터가 너무 끔찍하다.

이미 선교사로 헌신했던 나는 '그 까짓 섬 사역 정도야!' 하면서 사는 문제를 그리 고민하지 않았다. 정말 주 예수만 있으면 될 것 같았다. 그것도 나와 같이 갈 평생 친구가 생겼으니 더 이상 감사할 게 없었다. 남편은 섬에서 우리가 살게 될 보금자리가 준비 됐다며 신혼 여행 마지막 날 섬과 우리가 살 집을 둘러보자고 했다. 그렇게 신혼 여행 마지막 날, 신혼여행 공식복장인 예쁜 투피스에 나의 아담한 키를 보완할 8센티 굽의 구두를 신고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에 도착했다. 아뿔싸! 그제서야 내 드레스 코드가 어촌 사람들과 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빼 바지를 준비할 생각을 전혀 못했던 것이다. 이미 분위기와 맞지 않은 나의 드레스 코드는 엎어진 물이었다. 육지에서 30분 배를 타고 드디어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도리 대도 섬으로 향했다.

뭍을 떠나 잠시 후 섬 선착장이 다가오자 남편은 동산 맨 꼭대기에 푸른 하늘 바로 밑에 있는 집을 가리키며 저 집이 우리가 살 집이라고 했다. 하늘 아래 언덕 위에 예쁜 집을 보니 어느 노랫말이 스쳐갔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싶네” 앞으로3년간 사랑하는 우리님과 함께 사역 할 곳이라 생각하니 행복했다. 섬 사람들이 낯설긴 했지만 정겹고 반갑기도 했다. 선착장엔 어망을 다듬는 어른들과 구경 나온 몇몇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반갑게 아이들과 눈 맞춤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xxx!" 그들 중에 있었던 한 아이의 환영인사였다. 마음을 추스렸다. ‘뭐... 주님은 십자가에도 못 박히셨는데, 이까짓 침 세례와 욕쯤이야...’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 후 거기서 사는 동안 그 아이의 욕과 침 세례를 나중에 한 번 더 받았다. 분명한 건 그 행동은 그 아이의 본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환영인사가 끝나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올라 우리가 미래에 살 집에 이르렀다. 언덕 꼭대기에 아름다운 경치를 끼고 우리집이 있었다. 집 앞뒤 아래는 온통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흥분된 마음으로 마당에 들어섰다. 그 순간 ‘Wonderful! Beautiful! Joyful! ful! ful! ful!’을 마음으로 외쳤다. 선교사로서 비전이 같았고 소명이 같아 만난 남편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남편은 신대원 2학년때부터 섬을 찾아 다니고 이 섬을 사역지로 정하고 주민들을 찾아 다니며 겨우 이 집을 얻었다. 그리고 결혼식 전까지 매 주말에 내려와 사역을 병행하며 우리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혼 여행 마지막 날을 섬에서 보내고 다음날 상경했다. 서울에서 4개월의 신혼을 보내고 7월초에 섬으로 3년을 계획하며 이사를 했다. 나의 남은 신혼생활은 이렇게 섬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남편은 섬 사역과 일주일에 한번 서울을 다니며 신대원 3학년 과정을 병행했다.

지금은 이 섬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멋있는 관광명소로 탈바꿈을 했지만 그 당시 섬은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장수 이씨 씨족사회로 58가구가 있었으며 그 중 육지로 교회를 다니시는 두 분의 교인이 있었다. 교인 중 한 분이 푸세식 화장실 옆에 헛간을 우리에게 내 주었다. 창고로 썼던 방은 천정 없이 화장실과 연결돼 천정이 뻥 뚫려 향기로운 냄새가 그대로 방으로 흘러 들어왔다. 방 양쪽 벽 위로 스티로폼 뚜껑을 덮고 도배를 하니 드디어 천정이 있는 제법 쓸만한 방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칸을 막은들 냄새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밥을 먹는지 뭐를 먹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방 뒷면에 흙을 부셔 샷시 틀을 대고 조그만 창문도 만들었다. 방 뒤로는 갯벌로 가는 골목길이 있었는데 이 공간도 담벼락을 이용해 나무 틀을 대고 그 위에 비닐창을 만들어 뚫린 하늘을 막았다. 방 옆에 있던 하수도 옆 담벼락과 방과 연결된 공간을 모두 막고 부엌을 만들었다. 부엌 입구에 나무 문틀을 대고 비닐창을 씌워 부엌 문을 완성했다. 마무리 작업으로 구들장 위에 장판을 깔고 나니 근사한 입식 부엌이 되었다.

이렇게 건축가로 변신한 남편은 손수 집을 만들어 아내를 위한 완벽한 신혼 집을 만들었다. 7월에 서울에서 이사를 했는데10 월이 되면서야 그 집에 난방을 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듬해 딸아이가 태어났다. 밤마다 나타나는 20센티 정도되는 큰 지네들이 방을 휘저어 갓 태어난 우리 딸을 물면 어떡하나 걱정에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고, 찬 이슬을 맞으며 하수구를 통해 나타난 수 십 마리의 민달팽이들이 부엌과 도마 위에 번질번질한 침을 흘리고 다녀 너무 징그러웠고, 마당에 뱀들이 출몰하면서부터 부엌 밑 구들장에 뱀 굴이 있었는지는 알게 됐을 땐 사지가 오그라 들었다. 방도 마당과 바로 연결돼 있어서 아무 때나 불쑥불쑥 들어오는 동네 아이들로부터 무방비였다. 이런 불편함들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이렇다 한들 뭐가 문제겠나 싶은 생각에 큰 불평 없이 잘 견뎠고 선교지는 이 보다 더 할텐데… 하는 생각들이 위로가 되었다. 감사한 것은 지난 19년 동안 선교지 그 어떤 곳도 환경적으로 이렇게까지는 열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년반을 섬에서 살면서 전도와 심방을 멈추지 않았다. 밤이면 어린 딸을 등에 업고 그 좁은 방에서 7,8명 정도되는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부모들이 아이들을 주일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내게 침을 뱉었던 아이와도 화해를 하게 되었고 병중에 계신 어르신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도 있었다. 주일 학교가 생겼고 어르신도 생기고해서 두 번에 걸쳐 교회 건축을 시도했지만 예상대로 강한 반발이 있었다. 이렇게 하는 동안 어느새 정한 시간이 다가왔고 우리는 선교지인 말레이시아로 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 곳 섬에서 우리는 많은 영적 전쟁을 치렀다. 매일 우리집에서 살다시피 한 주일 학교 한 아이의 생명을 바다에게 뺏긴 아픈 기억도 있다. 다행히 시댁 식구들과 친정 식구들이 물질과 기도로 우리의 헌신을 격려해 주셨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 예수님 믿으면 꼭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비난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감사했다. 첫 해 10월이 되면서 시댁 식구들이 추석휴가를 포기하고 서울에서 그 곳까지 내려와서 방바닥에 보일러를 깔아주고 가셨다. 덕분에 매년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풍과 태풍에도 비닐창들은 단 한 번도 비가 새거나 찢어져서 보수해 본적이 없었다.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선교지를 나가기 전 굳이 그런 경험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젊음을 허비한 것은 아니었을까, 남편에게 왜 알아주지도 않는 사역에 “NO”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시대가 변해도 복음은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참으로 많이 불렀던 찬송이 생각 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 인들 막으리까”. 그 때 나에게 이런 고백들이 없었다면 결코 결혼도 섬 사역도 내게 없었을 것이다. 복음을 가지고 들어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섬사람들의 마음을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고, 슈퍼도 대중목욕탕도 마음의 친구도 없는 그 곳에서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이라곤 겨우 혼자서 갯벌에 나가 바지락을 깨고 때로는 시를 쓰며 마음을 달래는 것 뿐이었다. 한국에서의 이런 선교후보생의 준비 작업은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 종족을 더욱더 사랑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었다.

주님을 영접한 후 기독교 공동체를 벗어나지 못했던 나에게 섬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의 소중함을 볼 수 있게 해주었고 선교사로서의 외로움도 연습했으며 조건 없이 사람들을 아버지의 눈과 마음을 가지고 섬겨야 함도 배웠다. 비록 우리가 울부짖었던 만큼 열매가 많지는 않았지만 선교 후보생의 가치 있는 경험들이었다. 지금도 외톨박이 섬처럼 힘든 곳을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현지인들과, 동역자들과, 사역과, 환경과, 감정과, 건강과 싸우면서 선교지에서 분투하고 인내하시는 동역자님들께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필자소개 :
한배임 선교사는 남편 진용삼 선교사와 M선교에 부르심을 받고 1996년 파송을 받았다. 말레이시아와 요르단을 걸쳐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진실되고 솔직하다는 의미를 가진 대학교3학년 딸, 진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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