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큰 만남

번호

222

 

작성자

김영숙()

작성일

2015-09-05 20: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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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칼럼 53호(2014년10월28일)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숱한 만남을 경험한다. 폴 투루니에 (Paul Trounier)는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큰 만남> 에 대해 서술했다.(만남에 있어 크다, 작다를 논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으나 여기서 '큰 만남'은 인생에 있어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 의미 있는 만남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폴 투루니에가 몇 권의 책을 집필했을 때, 처음으로 쓴 책을 학교 다닐 때 알게 된 고전과목 선생님을 찾아가 보여드렸다. 왜냐하면 그리스어를 가르치시던 고전 선생님 때문에 폴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폴 투르니에는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사는 학생이었다. 물론 오랫동안 고전 선생님을 뵙지 못했지만 폴이 선생님을 만나 책을 보여드렸을 때, 선생님은 제자의 작품을 직접 읽어 주었고, 첫 장이 끝나고 다음 장을 읽다가 멈추고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 때 폴은 선생님이 자신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마음이 생겼다.이 때 선생님은
"폴, 우리 함께 기도할까?"
그런데 폴은 선생님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선생님은 기독교인이 되셨습니까?"
"그럼"
"언제부터요?"
"지금부터"
이렇게 해서 폴 투루니에와 선생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만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기도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나도 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고, 앞으로도 만남은 계속 지속될 것이다. 특별히 문화와 언어가 다른 다양한 만남을 접한다. 그런데 폴 투루니에가 말한 것처럼, 나를 통해 사람을 움직여서 변화시키는 만남이 내 인생에서 몇 번이나 일어났을까, 나 또한 다른 사람과의 만남으로 얼만큼 내 삶에 변화가 왔을까,

사람들은 만남을 통해서 서로의 진실을 알게 되고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이 깨지는 것도 진실된 열린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서로가 솔직한 만남일 경우에만 변화가 일어날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저건 틀렸어' 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편견'은 무서운 것이고, 특별히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반드시 병행하는 것이기에 정말 신중해야 한다.

얼마 전, 좀 오랜 시간을 함께 여행한 분이 있었다. 나는 그 분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모르고 있었고 순간순간 당황할 때도 있었다. 물론 상대방도 나 때문에 겪는 고충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때마다 나는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기를 원했고, 서로 이해하며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주력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사람이 사람을 절대 다 안다고 말해도 안되고, 혹시 나와 다른 행동이나 말을 해도 절대로 '틀렸다'라는 생각보다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관계는 다시 회복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예수님과 12제자가 3년 넘게 생활할 때,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만남은 이미 진실된 관계였기에 아니, 스승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정확히 알고 계셨기에 수년을 함께 사역하셨을 것이다. 오히려 한 고향에서 늘 마주치며 자란 제자들은 스스로 <만남과 삶>의 관계에서 갈등하고 오해하고 부딪쳤을 것이다.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작 그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부분까지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3년 넘게 함께 사역한 제자들은 서로가 얼마나 많이 상처 주고 상처를 받았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나 늘 그들 곁에는 예수님이 계셨기에 관계가 깨지지 않고 단단해져 '큰 만남'이 지속될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이 된다. 폴 투루니에가 간증한 것처럼 " 언제부터요 ?" "지금부터".

제자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순간부터 호흡을 함께하는 진실된 '큰 만남'을 깨닫고 이해하고 실천하여 결국 제자에서 사도로, 그리고 순교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내에서 인간 관계는 솔직성과 대담성 혹은 적극성이 있어야 비로서 진정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의 만남의 접촉 점은 단지 그들을 만났을 때 이야기하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기도해 주셨다. 지극히 단순한 방법 같지만, 만남의 방법에 있어 중요한 원리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되는 경험의 만남인데, 기독교에서는 성찬 (communion)이라 한다. 이렇게 성찬'의 의미가 엄청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례적으로 진행되는 성찬 예식에서 얼마나 많이 예수님과 '큰 만남'을 경험하며 살고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 것을. 이런 진실한 '큰 만남'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 필자소개

1995년 12월 파송 되어 인도네시아 바탐 Batam섬에서 현재까지 사역 중. 4년제 신학대학교(STT BASOM)를 운영하며,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 세상으로 나가도록 도전하며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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