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Women Break the Silence on Domestic Violence

번호

222

 

작성자

Yayori Matsui()

작성일

2004-10-18 17:05:20

추천

0

조회

1394

 

<아시아에서의 여성폭력 문제>

이 글은 Yayori Matsui, Women in the New Asia: From Pain to Power, Translated by Noriko Toyokawa and Carolyn Francis, London: Zed Books(1999) 중 제5장인 “Women Break the Silence on Domestic Violence"를 번역ㆍ정리한 것이다.


마오 콘(Mao Corn)은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의 무단거주지에서 툭툭(삼륜 택시)을 몰고 있는 남편과 살고 있었다. 이 남편은 두 번째 남편이다. 그녀는 일찍이 농촌 마을에서 결혼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 남편은 결혼 후 직장을 찾기 위해 프놈펜으로 떠났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마오는 그를 찾으러 프놈펜으로 갔다. 그녀는 병에 걸려 쓰러졌다. 한 친절한 택시 기사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그 후 그녀는 이 사람과 결혼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노름으로 물소를 모두 잃고 농사를 더 이상 계속 지을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첫 부인을 시골에 두고 프놈펜에 온 사람이었다. 이 남편과의 삶에 대한 마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오늘 밤 남편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남편의 폭력은 결혼한 지 3년이 지나자 시작되었다. 나는 그의 종이고 노예이다. 도박장이나 매춘굴을 다녀온 날이면, 그는 저녁식사에 대해 불평을 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그는 나를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밧줄로 묶고 대나무 막대기로 두들겨 팼다. 나는 항상 상처와 피투성이다. 내가 우는 경우, 그는 더 잔인하게 행동한다. 나는 이웃들이 들을까봐 부끄러워 큰 소리도 내지 못한다. 최근 그는 또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어느날 그에게 “매일 나는 무거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물건을 팔기 위해 도시 곳곳을 걷는다. 당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려고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번 것으로 먹은 후 더 심하게 나를 때리기만 한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그는 노끈으로 내 목을 감아 나를 질식시키려고 했으며 나를 집밖으로 끌어냈다. 진흙탕 위에서 치마는 벗겨지고 살갗이 드러났다. 너무 창피한 나머지 나는 그를 죽이기 위해 집안으로 달려가 칼 하나를 들었다. 우리는 모두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서로 싸웠다. 나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그저께 밤에는 장작으로 등을 맞았고 어제 아침에는 쇠파이프로 맞았다. 그와 이혼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마오는 집에서 도망쳐 나와 여성단체인 크메르 여성의 소리(Khmer Women's Voice)를 찾아갔다. 위의 이야기는 이 단체에서 제작한 비디오에서 마오가 한 것이다. 그녀의 몸은 가냘프고 수척했으며, 창백한 얼굴은 상처로 덮여 있었다. 비디오에서 마오는 영혼을 쏟아내듯 흐느껴 울고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내레이터는 “이 비디오가 만들어지고 한 달 후 그녀는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고 말한다.
나는 1994년 12월 프놈펜에서 열린 가정폭력에 관한 아시아-태평양 회의에서 이 비디오를 보았다. 이 회의는 베이징의 제4회 UN세계여성회의를 준비하는 UNICEF와 캄보디아 여성부가 함께 후원하였다. 아시아의 다양한 국가에서 온 40명의 대표자들과 캄보디아에서 온 300명의 여성들은 폭력을 근절하는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캄보디아는 미소의 나라로 알려져 있으며 사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아주 온화하다. 그러나 회의에 제출된 이 비디오와 “캄보디아의 가정폭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처음으로 가정에서의 남편 폭력이라는 숨겨진 현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300쪽에 달하는 보고서는 심하게 맞은 여성 50명과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성들의 어머니들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가정폭력의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 남편의 폭력은 사적인 문제이므로 참아야만 한다는 아내의 신념

2. 가난, 도박, 알코올 그리고 낮은 교육 수준

3.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을 조장하는 성차별과 불평등

4. 자신의 역경이 전생에 한 일에 대한 응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불교관과 여성으로 하여금 문제를 숨기도록 만드는 수치심

5. 가해자를 처벌하는 제도가 결여된 점

6. 캄보디아의 특유한 문제로서 폴 포트 정권하의 폭력의 영향

이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7백만의 캄보디아인들 중 1백만이 죽음을 당한 폴 포트 지배하의 폭력의 여파가 여전히 캄보디아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캄보디아 여인은 “폴 포트가 장악한 크메르루즈 시대에 캄보디아 남자들의 심성은 변했다. 내 남편은 당시 폭력을 목격한 결과 사소한 일에도 난폭해졌다”고 증언한다. 그녀의 남편은 과거 폴 포트의 군인으로 도끼를 그녀의 머리에 대곤 했었다. 이 보고서는 유혈학살에 대한 일상의 경험에 충격을 받은 남성이 약한 지위에 있는 부인에게 얼마나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게다가, 폴 포트 지배하의 대량 학살은 남성과 여성간 인구불균형의 결과를 낳았다. 현재 4 명의 남성에 6 명의 여성이 있다. 이것은 여성의 지위를 더욱 약하게 만든다. 많은 사례들에서 보고되는 것처럼, 남편들은 첩을 맞아들이고는 부인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고 또 이들을 학대까지 한다.

국가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나 모든 국가들의 여성은 남편의 폭력에 고통을 겪고 있다. 1995년 8월 가정폭력에 관한 한 공개청문회가 스리랑카 콜롬비아에서 열렸다. 이 청문회는 '여성인권 네트워크'(Women's Human Rights' Network)와 '여성법과 개발에 관한 아시아-태평양 포럼'(Asia-Pacific Forum on Women's Law and Development)이 후원했다. 이 청문회의 목적은 여성폭력에 관한 UN특별 보고자로 임명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라는 스리랑카 여성 법률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3 명의 희생자와 8개국에서 온 여성 지원단체 대표자들이 이 청문회에 참석했다.
네팔에서 온 24살의 시타(Sita)는 선명한 색깔로 수놓아진 숄을 걸친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다. 그녀가 숄을 치웠을 때 그녀의 양손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녀는 마침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는데, 술 취한 남편이 칼을 갖고 덤벼들었다.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들어올린 양손은 남편의 칼에 손목에서 잘려나갔던 것이다.
검은 피부를 가진 23살의 아나마(Anama)는 인도 출신의 말레이시아 여성으로, 목에 심하게 탄 흉터가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야자유를 생산하는 농장의 노동자인데, 어느날 그녀에게 석유를 붓고 그녀를 태워 죽이려고 했다. 그녀는 2주간 의식을 잃었다. 그녀는 화상에서 회복되자 자살을 시도했다. 마침내 남편이 11살짜리 딸을 강간하자, 그녀는 집을 떠났다.
3 명의 자녀를 둔 42세의 한국 여성 성종만은 한 군인에게 강간당하고 마지못해 그와 결혼했다. 남편은 술을 마실 때마다 폭력적으로 되었다. 그녀는 노이로제에 걸렸고 집을 수 차례 떠났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의 여동생과 다른 여성들과도 성관계를 맺는 것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보호소를 찾았다.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남편의 폭력에 대해 증언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여성 상담프로그램과 보호소 설립 등과 같은 피해자 지원 활동의 증가로 증언이 더욱 용이하게 되었다. 콜롬보 회의에 참여한 단체 중의 하나는 1982년에 말레이시아의 여성들에 의해 설립된 첫 NGO 여성보호소인 여성원조기구(WAO)였다. 남편의 폭력은 사적인 문제라고 여겼던 여성 피해자들은 지금은 전화상담을 받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보호소로 피신한다. 게다가 그 보호소는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강간과 성 희롱을 포함한 다른 유형의 폭력에 대해 인식을 갖도록 해주는 장소가 되고 있다.
10년 이상의 여론환기활동 결과 여성 캠페인은 마침내 가정폭력에 대한 한 법안을 제정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폭력 운동가인 아이린 페르난데스(Irene Fernandes)는 “여성 피해자들을 직접적으로 보호하는 이 법은 가정폭력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이 캠페인의 결과 젠더의 관점에서 운동하는 페미니스트 여성 단체들이 전국에 생겼다. 전통적인 여성운동과 달리 이 운동은, 여자들이 개인이 아니라 그룹 차원에서 행동을 취함으로써, 모든 여성이 자매라고 강조한다. 보호소와 전화상담은 자선행위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후원하는 여성끼리 서로 힘을 실어주기 위하여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여성 운동은 위안부, 강간, 남편폭력을 주관심사로 다루면서 성폭력 이슈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83년에 설립된 한국여성의전화연합(Korean Women's Hot Line)은 지금까지 숨겨진 이슈인 남편폭력을 드러내는 장소가 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질문에 응한 800명의 여성 중 45%가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데, 이것은 폭력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1,000명 이상의 핫라인 자원상담자를 교육시키고 있으며, 많은 지역에 보호소를 설립하고 여성 피해자들을 후원하는 데 관여하고 있다.
1990년대에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24개의 여성 단체들에게 전화를 하여 성폭력에 관한 법을 제정하는 캠페인을 시작하는 데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1993년에 한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법이 전국적인 보호소의 설립에 대한 요구뿐 아니라, 강간에서부터 성희롱 그리고 인터넷상의 포르노 메시지의 전파까지도 포함하는 성폭력에 대한 정의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보면 하나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아직 여성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기에는 멀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의 대표이자 위안부에 관한 국제연맹의 대표의 신혜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성폭력을 정조를 잃어버리는 것쯤으로 여기는 현행 형법의 개념을 바꾸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특별법에 혼인 후 강간도 포함시키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여성으로서 우리는 성행위가 어디까지나 자신의 결정 사항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강간을 여성 인권에 대한 침해라고 보기 때문이다. 새 법은 부인에 대한 남편의 성폭력 이슈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이에 우리는 더욱 효과적인 성폭력 반대법 제정을 위한 캠페인을 계속할 것이다.

일본에서는 가정 폭력, 특히 부인에 대한 남편의 폭력은 강간이나 성희롱과 같은 성 폭력유형과 비교할 때 표면화되는 이슈는 아니다. 그러나 1992년에 Husbands' and Partners' Violence against Women Study Group이 실시한 한 조사에 따르면, 800명의 여성 응답자 중 과반수가 모종의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으며, 약 300명의 응답자가 이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응답자들은 사회적 각성의 증대, 여성 피해자에 대한 후원의 증가와 폭력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보다 효과적인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94에 일본변호사협회(Japan Bar Association)가 실시한 배우자폭력 핫라인(Hot Line on Spousal Violence)의 보고서에 따르면, 1,249통의 전화 중 563통은 이혼과 관계가 있었는데, 이 중 3분의 2, 혹은 65.8%는 남편 폭력에 대한 보고였다. 일본변호사협회는 전화 조사의 결과를 다음과 분석한다.

일본에서는 부인들 스스로가 남편의 폭력을 인권문제나 사회문제로 인지하지 않는다. 부인들은 남편의 폭력을 가정문제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이 문제를 다루는 공적인 정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여성은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정부지원을 받지 못한다.

“일본에서의 가정폭력과 성적 착취”(Domestic Violence and Sexual Exploitation in Japan)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일본에서 조사를 수행한 미국의 여성 문화인류학자 샤먼 바비어(Sharman Babior)는 “일본의 여성은 부끄러움이 많아 자신의 문제를 논하기를 꺼려하고 고통을 계속 견디려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이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일본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일본이 중시하기 시작해야 할 도전이다.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은 부인에 대한 남편의 폭력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출생 전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성차별에 의한 폭력(gender violence)의 위협을 받는다. 단지 여성이 된다는 것은 평생 폭력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폭력은 초음파 검사의 결과를 토대로 한 여아 낙태와 살인, 유기, 교육받을 기회의 결여, 어린이 성학대, 부모에 의한 인신매매나 나이든 여성에 대한 학대도 포함한다. 소년이 소녀보다 우월하다고 인식되는 사회에서는 소녀들의 삶은 파괴된다. 인도에서는 여성 대 남성의 비율이 떨어지고 있다. 1,000명의 남성 당 여성의 비율이 1901년의 972명에서 1951년에는 946명으로 그리고 1991년에는 929명으로 낮아졌다. 인도에서는 신부가 결혼 시 신랑에게 지참금을 갖고 가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이 지참금의 액수가 인도의 경제 성장과 함께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딸을 가진 많은 가족들은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히고, 이것은 여아 낙태를 낳는다.
태아 성 판별의 수단이 발전됨과 더불어 이 검사를 받는 임신 여성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78,000명의 여아가 낙태되었고 여아 낙태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발전된 과학기술을 이런 목적에 이용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태아 성판별 검사를 할 여유가 없는 가난한 여성들은 출산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따라서 여자 영아 살해가 일반적이다. 26세의 한 어머니는 인도의 한 잡지에서 말한다. “내가 내 아기를 죽이는 이유는 지참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가정의 딸로서의 평생의 굴욕에서부터 구해주기 위해서이다. 남편과 나는 평생의 고통보다 한 두 시간의 고통이 따르는 죽음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을 차별하는 전통적 관습과 가난과의 관계를 명백히 볼 수 있다.
만약 소녀들이 출생 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더라도 소년들보다 영양을 덜 섭취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소년들의 28%가 영양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는 데 비해, 소녀들의 그 수치가 71%가 된다. 게다가 통계에 의하면, 의술치료를 위해 병원에 데리고 온 소녀의 수는 소년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도에서 여아 사망의 비율이 남아보다 높은 것은 당연하다. 만약 소녀들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학교 입학은 소년보다 낮고 심지어 만약 소녀가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 중 많은 수가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교육의 성차별은 여성의 자립을 어렵게 하고, 이로써 여자들은 평생 남자에 종속되고 만다.

십수억 명의 인구를 가진 인구밀도 높은 중국은 1979년에 ‘한 자녀 낳기 정책’을 시행했지만, 그것은 여아살해라는 결과를 낳았다. 1949년 혁명 이후 반세기동안 법제화와 교육을 통해 행해진 남녀평등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남성 우월의 유교철학이 뿌리 깊게 남아있다. 특히 농촌지역에는 한 자녀 낳기 정책으로 여아보다 남아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1983년 광동성과 안휘성에서 여아살해가 증가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 세계에 널리 퍼지자, 중국의 총리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간 출생률에서의 격차는 증가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행해진 한 조사에 따르면, 1980년에 100명의 여아 당 남아는 108.5명이 태어났고, 그것은 1990년에는 111.4명으로 증가했다. 1989년에 태어난 총 여아의 수는 남아의 수보다 600,000명이나 적었다. 이러한 차이는 여아낙태와 여아 수중질식사 또는 출생된 여아를 공식적으로 등록하지 않은 결과이다. 중국 여성을 연구하는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혁명 전에 여성은 열등한 존재라는 유교적인 시각과 가난 때문에, 여아 살해는 중국에서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유아 살해가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여아살해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한 자녀 낳기 정책으로 사람들이 남아를 선호하기 때문에 여아살해가 또 다시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여아를 임신한 엄마들에 대한 학대의 문제도 있다. 남편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고, 시어머니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거나 이혼시킨다. 부인이 여아를 임신한 것을 알고 실망하고 화가 난 한 남편이 부인의 질에 폭죽을 집어넣었다는 비극적인 일이 보도된 바가 있다. 한 중국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중국정부가 효율성을 우선순위에 둔 개혁정책과 시장경제를 펼쳤을 때, 농촌 마을들에서 개인적인 노동계약 시스템이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농업 노동력을 제공하는 남아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이리하여 여아들은 유아살해나 유기의 희생이 되었고, 소녀 인신매매도 증가하게 되었다.

더구나 최근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은 확대되고 있다. 나라마다 폭력의 특정유형은 다르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여성에 대한 전통적 경멸이 시장경제로의 전환과 더불어 지속되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

샬로트 번치(Charlotte Bunch)는 젠더의 시각에서 인권 문제를 재고할 것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하나의 인권 문제로 인정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세계적인 여성운동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미국 페미니스트 운동가로, “여성에게 가정은 가장 위험한 곳이다. 때때로 가정은 학대나 고문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성차별은 매일 여성을 죽이고 있다”고 말한다.
배우자에 의한 학대는 미국에도 만연해 있다. 여성이 입는 부상의 주요 원인은 남편의 폭력이다. 통계에 의하면 여성 살해의 90%가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고, 이러한 남성의 반이 남편이나 남자 친구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폭력은 여성의 성을 지배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이다”고 선언했으며, 1960년대 후반 여성해방운동 이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이슈화시켰다. 그러나 여성폭력 이슈는 1976-85년의 UN 여성의 십년(UN Decade for Women)이나 이 10년간 생산된 것으로는 가장 중요한 정책성명서인 ‘여성에 대한 모든 차별 근절을 위한 국제협약’(Convention on the Eradication of All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에서도 충분한 주의를 끌지 못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의 여성들은 ‘UN 여성의 십년’의 마지막 해인 1985년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3회 UN 여성세계회의 이후 여성폭력 이슈를 세계적인 것으로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여성폭력은 저개발국가들에서도 여성 운동의 주 이슈로 등장했다. 인도의 여성들은 결혼지참금 살인과 강간에 대한 투쟁을 전국적으로 조직화하였다. 세계 도처에서 폭력은 여성을 위협하고 있지만, 특히 더 불리한 위치에 있는 가난한 나라들에서 여성들의 희생이 더욱 크다.
여성폭력은 남과 북의 모든 나라들에서 여성의 공통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1993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회의에 앞서서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를 확인하는 국제적인 서명수집 캠페인이 행해졌다. 그 결과, 비엔나 선언(Vienna Declaration)은 여성의 인권을 명확히 정의했으며, 모든 나라에게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없애는 노력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전 세계에 걸친 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성취된 비엔나 선언을 토대로 하여, 여성폭력 근절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n the Eradic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이 1993년 말 UN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이 선언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가정폭력, 사회폭력, 국가폭력의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며, 국가가 가해자를 기소하고 피해자를 지원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음을 밝힌다.
그밖에 1995년 제4회 UN세계여성회의에서 채택한 행동강령 역시 12개의 중요한 관심분야들 중 네 번째 영역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포함시킨다. 이 강령은 가정폭력, 강간, 성희롱, 여성 인신매매, 섹스관광, 포르노그래피를 여성의 인권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보호를 위한 전략들을 제시한다. 행동강령은 또한 여성피해자들의 보호보다는 여성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함을 지적하며, 이와 함께 경찰들과 공무원들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행동강령에 열거된 다섯 번째의 관심영역인 여성과 무력분쟁에서는 무력 분쟁동안 강간은 범죄행위라고 선언하며, 피해자의 보상과 가해자의 처벌을 포함하여 군대의 성적 노예에 대해서는 “위안부”의 생계비 지불 등과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1975년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된 제1회 UN세계여성회의 이후 첫 10년 동안은 성역할 변화와 여성차별의 근절에 초점이 놓여져 있었다. 그 후의 10년 동안은 성 폭력(gender violence)과 더불어 여성의 인권이 집중 조명되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부인을 때리는 남편을 정상으로 본다. 남편들이 자신의 부인이 아닌 여성을 학대하면 신체에 대한 상해죄로 고소를 당하지만, 부인 학대는 사적인, 가정적인 문제로 간주되기 때문에 관대하게 다루어져 왔다. 여성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폭력을 인권에 대한 폭력으로 정의했으며, 그것을 개인적 문제의 수준에서 국가가 책임을 지는 사회적 문제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여성폭력이라는 심각한 이슈에 대해 일련의 행동 파장을 일으킨 것은 바로 여성의 힘이다.
여성폭력에 대한 국제적 수준을 이만큼 발전시킨 것은 그러나 폭력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시작에 불과하다. 폭력을 근절하려는 여성의 노력은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이다.

 

 

no

이름

제                   목

작성일

조회

추천수

62

정연식

사회주의 혁명과 여성 문제: 베트남 사례

2004-12-02

2186

0

61

배긍찬

"동북아시대"와 한국의 외교과제

2004-12-02

1693

0

60

운영자

캄보디아의 2003년 7월 총선 분석

2004-11-10

2889

0

59

Yayori Matsui

Women Break the Silence on Domestic Violence

2004-10-18

1395

0

58

운영자

베트남의 새 종교신앙법령(04년 6월)

2004-09-24

182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