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캄보디아의 사회적 상황

번호

222

 

작성자

정미경()

작성일

2009-10-27 09: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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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사회적 상황

사회문제

1994년의 한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캄보디아의 절대 빈곤층은 인구의 40%였다. 1997년도에는 36% 정도로 줄기는 했어도 여전히 동남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173개국 중 130위에 그치는 가난한 나라였다. 인간개발지수(HDI)도 0.543으로 최하위권이다. 교육을 비롯한 각종 사회지표에 나타나는 남녀 간 불평등도 아주 높은 편이었으며, 15-49세 사이 인구 중 HIV/AIDS 환자 수도 2003년 현재 123,100명으로 가장 높은 나라에 속했다. 하루에 평균 6명 정도의 일반 가정주부가 남편으로부터 에이즈를 옮겨 받아 새로운 환자가 되어갔다.
인구의 증가도 급작스러웠다. 1993년에 불과 930만이던 것이 2005년에는 1,370만으로 늘었다. 그리고 인구의 55%는 19세 이하의 인구였다. 1993년도의 총 고용 인구는 390만이었고, 이 중 농업 종사자가 80% 이상, 서비스 16%, 산업 3%였다. 2004년의 통계는 총 고용 인구 750만, 이 중 농업 종사자 60.3%, 서비스 분야 27%, 산업 12.5%로 늘었다. 매년 약 22만 명 정도의 새로운 노동 인구가 노동 시장으로 들어온다. 결과적으로, 2000년에 28%였던 실업률이 2001년에는 38%로 급증하는 사태가 되었다.
미성년자 노동도 심해, 17세 이하 소년소녀 중 53%가 경제 활동을 하는 형편이다. 이들 중 30% 정도가 산업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산업체 중 대부분은 봉제공장이다. 여기에는 많은 여성들이 고용되어 있으며 노동 시장의 탄력성도 큰 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직률이 높아 한 곳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며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한 달에 단돈 5달러이라도 더 준다면 그날로 옮겨 버리고 만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 나라의 전통 가치의 붕괴를 들 수 있다. 85%의 국민이 농촌 지역에서 생활하며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은 바로 사막키(samaki) 즉 상부상조 정신이었다. 그러나 30년간의 전쟁, 내전, 공산혁명, 학살, 쿠데타 등으로 이어진 처참한 역사적 경험은 이 나라 사람들을 깊은 사회심리적 혼란 가운데 빠뜨렸다. 사막키는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이기주의와 함께 극단화된 현실 중심의 사고가 횡횡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며 표정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불신, 그나마 정신세계에 영향을 끼치던 불교조차도 미신화되어 버린 사회적 정황, 피폐된 심성, 경제적 이유로 이산 혹은 해체되어버린 가정, 돈만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게 된 사회. 캄보디아 사회는 병리현상으로 찌들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캄보디아 최대 야당 지도자인 삼랑시의 부인 떠으렁 사우무라는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경제학자이다. 그에 의하면 폴 포트 통치 5년 간 전통적 가치관은 완전히 뿌리뽑혀 버렸다고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이 나라에는 공중도덕도 없고, 더불어 사는 방법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하도 많은 남자들이 전쟁과 혁명 그리고 내전의 와중에서 희생된 결과, 이 나라에는 한 때 남자가 모자랐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의 탈선행위가 심해져 중혼(重婚)은 물론 매매춘이 횡횡했고 심지어 자녀들을 매춘업자에게 팔아버리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사회적 아노미를 연구하고 돌볼 인력도 없었다. 집안에 정신병자가 생기면 병원이나 의사를 찾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고작 몇 년씩 집안에 가두고 쇠사슬로 묶어 감금하는 일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우울증과 정신질환, 알코올 중독, 자살이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보다도 심했으며, 심각한 심리적 소외 의식에 시달려 술과 매춘 등으로 달래 보려다 안 되면 결국 자살해 버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더구나 미군, 베트남군,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그 후에는 정권을 움켜쥐기 위해 서로 각축하던 정파들이 뿌려놓은 600여만 발의 지뢰로 인한 피해 등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캄보디아인 243명 중의 1명이 지뢰로 불구자가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돌볼 인력이 없었다.
1975년 폴 포트 혁명 이전에 캄보디아에는 12명의 정신과 의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처형당했던지 도주하여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1997년에야 겨우 10명의 정신과 수련의들이 노르웨이 의사들로부터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교육의 양도 질도 운운하기 어려운 사회적 풍토가 되어 버렸다.

교육 상황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된 캄보디아의 교육은 흔히 “교육의 대중화(Mass Schooling)”로 특징된다. 1950년부터 1960년까지는 초등교육에 치중했으며, 1960년부터 1970년까지는 중등교육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러나 당시의 중고등학교 교육은 인문계 학과목을 중심으로 편성된 커리큘럼에 따라 일반교양에 치중하였지 전문기술 인력을 키워내는 일에는 타당치 않은 교육이었다.
1975년부터 1978년 기간의 크메르루즈 시절에는 공교육이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고 교과서, 교육 보조자료, 인쇄소 등 교육과 관계된 대부분의 시설과 기술이 황폐화되어 버렸고, 몇 안 되던 교육관련 전문 인력들이 대다수 학살당했던지 혹은 외국으로 탈출했다. 전국의 행정망이 마비되고,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몇 안 되는 직업기술 센터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공교육은 공산혁명의 저해요인이고, 학식은 계급투쟁 대상으로 여겼다.
1979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정권 지원 하에서 공교육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는 당시 100만을 넘는 성인층의 문맹을 퇴치하는 일과 초등학교의 수적 증가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교육을 위한 조처가 오히려 수많은 학령 아동들에게 교육 혐오를 불러와서 학교 기피 현상은 이후에도 여러 해 동안 계속 되었다.
1997년부터 계속 이어져 오는 현 정부체제에서 교육 정상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양과 질은 아직 보장되지 못했고, 교육 정상화를 1975년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일반적 정서이기에 캄보디아의 교육은 국가적 교육수요와 사회경제적 요구에 대한 부응도가 낮다.
캄보디아의 학제도 다른 주변나라들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취학 전의 유치원 교육을 시작으로 초등교육 5년(1-5학년), 중학교 3년(6-8학년), 고등학교 3년(9-11학년), 대학교 과정 4년이다.
2005년 현재, 초등학교 6,963교, 중학교 688교, 고등학교 212교, 대학교 14개교가 있다. 대학교 중 국공립은 3개, 사립이 11개이다. 이 외에 직업기술학교가 33개교이다.
학생 총 수는 3,360,824명으로 초등학생 2,747,080, 중학생 459,986명, 고교생 153,758명, 대학생 41,733명이다. 2004년 CSES 자료에 의하면 학령 인구 중 1.4%가 대학에 재학하고 있으며, 0.8%가 직업기술학교나 기타 훈련기관에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00년도 CDHS 통계는 학령인구의 0.8%가, 1994년에는 0.2%만이 대학에 다닌 것으로 나타나 대학생 인구의 비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004년 현재 교원 수는 초등학교 교사가 53,271명, 중고교 교사가 27,648명이다.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에 종사하는 교원 수는 모두 80,919명이었다. 교사 대 학생 비율은 초등학교 52명(UNESCO 보고는 46명으로 되어 있음), 중고등학교 22명이다. 대학의 경우는 학교 당국의 비협조로 정확한 통계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UNESCO가 발표한 2004년 현재의 조사는 15세 이상 성인 전체로 볼 때 73.6%의 국민이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이는 남자 84.7%와 여성 64.1%가 문자해독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같은 해의 CSES 보고서는 7세 이상 국민 전체로 보았을 때 국민의 64%가 문자해독자이며, 남성은 74%, 여성은 60.3%로 나타났다. 두 기관의 조사 결과가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한편 15세부터 24세까지의 청소년의 경우는 그 비율이 훨씬 높아져 전체로는 83.4%, 성별로는 남성 87.9%, 여성 78.9%로 나타난다.
1999년의 국민 문자해독률 조사보고서는 15세 이상의 국민 중 39.6%가 문맹 이였으며, 남성은 35.1%, 여성은 41.4%에 달했다. 평균적으로 국민의 40여%가 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를 종족별로 보면 크메르족의 48.8%가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고산 지대의 소수종족 중에는 불과 남성의 5.1%만이 글을 읽을줄 알았고, 여성은 전원 까막눈이었다. 한편 문자해독률은 도시인의 경우가 농촌인구들보다 높아 남성 82%, 여성 71%였으나, 농촌 지역에서는 69%대 52.7% 였다.
위에 나타난 경향으로 보면, 캄보디아국민의 문자해독률은 사회의 안정과 함께 상당히 향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청소년층의 취학률이 향상되면서 이런 경향은 심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2004년의 CSES 조사 결과는 15세 이상 국민의 67%가 문자해독층으로 나타나 5년 간에 7% 이상의 국민이 문맹을 벗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전히 65세 이상 노년층에서는 67%가 글을 못 읽는 사람들로 남아 있다. 이 중 남자는 37%, 여성은 87%가 문맹이다. 이 나라의 노인 중 3명 중 1명꼴로 남성 문맹자이며 여성은 거의 모두가 까막눈이라 할 수 있다.

민족 상황

현재 1,500만으로 추산되고 있는 인구 중 90%는 크메르족이며, 중국계가 5%, 기타 베트남인, 미얀마인, 참족, 산간 소수부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성격은 산간의 소수민족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언어도 복식도 생활방식도 거의 유사하다. 이를테면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사회적 통합의 정도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종교적 신념체계가 불교를 공통분모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체계에서 유사성을 비교적 많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물론 소수민족의 경우에는 자신들만의 부족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사회적, 문화적 통합의 기초가 되는 언어조차도 타 종족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해가 구축되지 못하며, 이는 잠재적 소외감과 경계심을 불러오기도 한다. 따라서 외부세계와의 교류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크메르족의 경우 타 종족들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은 어느 곳에 가든지 흔히 볼 수 있다. 그만큼 크메르족이 호의적이고 개방적이라는 반증일 수 있다. 그러나 종족들 간의 분포 지역, 언어, 사회조직, 생업, 종교 등은 상당히 다른 스펙트럼을 나타낸다. 특히 50여만 명으로 추산되는 참족의 경우 몬돌끼리나 라따나끼리 지역의 산간 소수부족 못지않게 자기들만의 취락과 언어, 종교행위, 복장 등을 하고서 프놈펜의 메콩강 강변 지역, 꼼퐁짬, 꼼퐁사옴 등지에 집단 거주지를 이루고 산다.
종교적으로 크메르족은 대개 소승불교도들이다. 참족의 경우는 거의 이슬람 교도들인데, 그 중 정통주의자들은 주로 프놈펜과 주변 근교 지역에 거주한다. 그러나 비정통주의적 무슬림들은 여타 지역에 산재하여 생활한다.
베트남계의 경우는 가톨릭이나 개신교도가 많다. 불교의 경우도 이들은 주로 대승불교를 믿기 때문에 소승불교를 신봉하는 일반 크메르족과는 종교적 행위에서 상당히 다르다.
크메르족 불교도의 경우 대부분 힌두교와 불교, 거기에 더하여 토속 정령숭배 사상이 가미된 혼합주의 경향이 짙게 느껴진다. 이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나라의 최고 문화유산인 앙코르 와트가 본래 힌두교 사원이나 근처의 바욘 사원이나 앙코르 톰은 불교 사원인 고로 일반인의 눈에는 그 차이를 느낄 수도 필요성도 없이 전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혼합주의의 일상적 모습은 각 가정마다 세워둔 신당(프레아 포움)에서도 나타난다. 힌두적 신당에 진설한 내용물은 불교적 물품이며, 중국계의 경우는 관운장으로부터 기타 민속적 영웅들을 모시고 지방(紙榜)을 써 넣는 등 종교 종합전시장 같은 모습이다.
국경 지역 고산지대에 사는 소수민족인 크메르 로우는 주로 라따나끼리, 몬돌끼리, 끄라치에, 스뚱뜨렝 등지에 사는 퀴족, 프농족, 스티엥족, 브라오족, 페아르족, 자라이족, 라데족 등의 주민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마을을 이루고 산다. 이들은 마을의 촌장에 의해 공동체의 제반 일들을 처리하며 산다. 주로 화전을 일궈 밭벼나 야채 등을 재배하며 생활은 가족단위의 독립가옥에서도 하지만 대개는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다세대 공동주택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약 15만 명으로 추정되는 퀴족은 꼼퐁톰, 쁘레아 비히어, 스뚱뜨렝 등 북부의 태국 국경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중국계는 이 나라 최대의 소수민족 이다. 60% 정도는 수도를 중심으로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나 40%는 지방에서 소매업, 미곡가공, 과일, 건어물, 야자설탕, 사채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방언 구성은 조주 60%, 광동 20%, 복건 7%, 해남 4%, 객가 4% 정도로 나타난다. 해남인은 깜폿 지역에서 후추농장 등으로 성공했다가, 60년대 이후에는 수도권으로 이주하여 호텔, 음식점 등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복건인은 주로 수출입에 종사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 이 나라로 이주해 오는 객가 출신은 한약재 사업, 제화, 기타 소매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베트남계 사람들은 주로 동남부와 중부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대부분 프놈펜의 메콩강 부근에 모여 살지만 똔레, 바삭강 또는 똔레삽 호수 연안에도 상당히 큰 취락을 형성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크메르족보다는 오히려 중국계와 사회적으로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다. 더구나 10여년에 걸친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크메르족과의 사회적 거리를 소원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크메르족과는 다른 언어, 가족 구조, 의상, 음식, 종교 행위 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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