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동남아시아 이슬람의 유래와 식민주의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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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8 12: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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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이슬람의 유래와 식민주의의 역할

Hussin Mutalib
(싱가포르국립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13억 명으로 추산되는 전 세계 무슬림 가운데 약 60%는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이슬람 인구는 약 2억 5천만 명이다. 이 지역의 무슬림이 이슬람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소수이지만, 이슬람의 장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 그 역할은 결코 주변적이지 않다.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를 비롯, 역동적이며 현대적인 이슬람 국가 말레이시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인 브루나이 등이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 세 나라 외에도,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 등에 비록 소수이긴 하나 상당한 숫자의 이슬람 인구가 있다. 인도차이나에는 그보다 적은 규모의 이슬람 사회들이 형성되어 있는데, 각각 그 자체의 정체성, 열망, 의욕을 가지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여러모로 이점과 장점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 사실, 국민국가 건설의 일부 영역에서 이슬람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이 지역 무슬림들을 하나의 모델로 삼는다. 그것은 모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용적인 이슬람 신앙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과 현대화 때문이다. 이러한 자산은 차치하고라도, 이 지역 무슬림 간 다양성과 이질성, 그리고 같은 시민으로서 비무슬림 및 정부와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들도 이 지역 이슬람에 대한 분석에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도전들은 아래의 사항들을 생각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 이슬람의 실제의 성격과 범위
► 무슬림들의 광신적 종교성을 형성하는 데 작동하는 종족성의 두드러진 역할
►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이슬람의 형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종교적 엘리트(울라마) 간 의견 대립
► 비무슬림에 대한 무슬림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있어서의 수준 차이

무슬림 소수민족들, 특히 동남아시아의 저개발국가들에 사는 무슬림 소수민족들에게는 이러한 문제들이 더 더욱 절실히 와 닿는다. 많은 이들은 현대화, 세계화의 충격뿐만 아니라, 무슬림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요구가 국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에 직면하면서, 현재 상황을 힘든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의심할 나위 없이, 금세기 시작 이래 일련의 사건들, 특히 미국에서의 9.11 공격과 그 이후 미국 주도하의 “테러와의 전쟁”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과 그 신도들에게 새로운 시련과 고난을 안겨주어 왔다.
이 글은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이 전파된 지리적 유래와 기원 그리고 무슬림들의 종교적 삶의 내용과 윤곽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요소를 다룬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간단치 않다.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과 그 종교적 삶의 주된 측면과 관련하여 학자들 간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의 분석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초기 이슬람화의 유래와 중심지

이슬람이 동남아시아 - 캄보디아(캄푸치아)와 버마(미얀마)로부터 아래로는 태국 남부 빠따니(Patani), 말레이 반도 전체, 브루나이, 술라웨시로 해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인도네시아, 술루(Sulu) 그리고 필리핀 남부까지 대략적으로 걸쳐 있는 지역 - 에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 들어왔는지에 대해 외국 학자와 현지 학자 모두 많은 연구를 내 놓았다.
그렇지만 이슬람화 과정의 연대와 유래 그리고 누구에 의해 전해졌는가의 문제를 두고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갈라진다. 많은 학자들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이 도래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중국과 인도를, 그리고 뒤에 가서는 아라비아 남부 지방을 지목했다. 도서 지역에 있어서의 이슬람 전파에는 무슬림 상인(이들은 인도양 무역 루트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수피(Sufi) 선교사, 왕실과의 통혼, 국왕의 이슬람 개종, 이슬람의 매력과 보편성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슬람의 전파는 예측할 수 있듯이 동남아시아 내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다. 이슬람 신앙은 당시 지배적인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관련된 주요 사안의 영향을 받았다. 주요 사안은 종족성, 계급, 국가의 수용력, 정치 체제, 그리고 무슬림 사회가 해당 국가에서 다수인지 소수인지 등의 문제를 포함한다. 그리고 지형과 인구학적 측면도 동남아시아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이슬람의 다양한 유형들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이들 요인에 대해서는 뒤에 보다 더 논의할 것이다.
역사의 요소, 특히 이 지역 내에서 그 뿌리를 오랫동안 지탱해 온 종족적ㆍ종교적 및 문화적 전통과 규범들도 역시 중요했다. 옛날부터 동남아시아 무슬림들의 오늘날 삶의 많은 측면들은 독특한 힌두-불교 전통을 갖고 있었던 스리위자야(Sri Vijaya) 제국의 영향에 의해 윤색되었다. 비록 이 제국은 상좌불교(Theravada)의 영향이 오랫동안 확고히 유지되었던 중부 자와(Java)와 대륙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또 13세기에 붕괴되고 말았지만, 그 종교ㆍ문화적 유산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수피들이 이슬람이 전래되기 전부터 지배적이던 동남아시아의 사회ㆍ문화적 환경과 공존하는 것을 관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이러한 점과 더불어 스리위자야의 종교ㆍ문화적 흔적은 동남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실제 행해지는 이슬람의 특징으로 서서히 스며들어갔다.
이슬람화의 시작에 관한 한, 참파(Champa)와 수라바야(Surabaya) 같은 지역의 무슬림 묘비와 다른 역사 및 고고학적 발굴 자료 등으로부터 판단해 볼 때, 이슬람은 대략 10세기경 동남아시아 연안 지역에 도래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0세기 힌두교 왕국인 참파에 관한 중국 측의 사료에는 조정의 관료 아니면 무역 상인으로 보이는 몇 사람의 무슬림 남자의 이름, 예컨대 뿌 로 애(Pu Lo E) 혹은 아부 아(Abu Ah), 후 쉬안(Hu Xuan) 혹은 후사인(Hussain)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지역에서 대규모 무슬림 개종이 발생한 것은 15세기에 참파 왕국이 베트남에 패배한 이후였는데, 그것은 당시 말레이 세계에서의 이슬람 문명의 부상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의 해양 지역에서는 이슬람화가 약간 다르게 진행되었다. 이곳에서 13세기경 프디르(Pedir), 프를락(Perlak), 아루(Aru), 아체(Aceh), 사무드라(Samudra), 파사이(Pasai) 같은 연안의 주요 지역들에 이슬람 문화가 있었음이 바바드(babad)와 히카얏(hikayat) 등의 많은 현지 역사 문헌들에 지적되어 있다. 1282년 파사이의 통치자는 후사인(Husayn)과 술라이만(Sulayman)이라는 두 사람의 무슬림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10년 후인 1292년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여행기에 수마트라의 프를락(여행기에는 “Ferlec”으로 표기되어 있음) 사람들이 무슬림이라고 기록했다. 1297년에는 파사이의 초대 국왕인 술탄 알 말리쿠스 살레(Al-Malikus Saleh)의 비문이 파사이 국왕들을 모신 능묘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발견은 그 술탄에 대한 이야기들에서 뒷받침되고 있는데, 이들 이야기는 『히카얏 라자 라자 파사이』(Hikayat Raja-Raja Pasai)와 『스자라 믈라유』(Sejarah Melayu) 같은 역사적인 서사시, 그리고 이븐 밧투타(Ibn Batutta), 토므 피르스(Tome Pires), 중국인 무슬림 출신의 해군제독 정화(鄭和) 같은 항해가와 여행가의 기록에 나온다. 당시 파사이는 이미 중동 지역, 특히 메카와 이집트의 무슬림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 증거로 메카의 일부 학자와 율법사(ulama)들이 파사이의 율법사에게서 종교에 관한 전문적인 의견을 구한 사실을 적은 역사 기록들을 들 수 있다.
이슬람은 수마트라의 파사이로부터 말레이 반도의 항구도시 믈라카(Malacca)로 전파되었는데, 믈라카는 15세기에 파사이를 훨씬 능가하여 동남아시아 전 지역의 주도적인 이슬람 중심지가 되었다. 고고학적 유물뿐만 아니라 사료와 연대기들은 믈라카 왕국의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 국왕이 1414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므갓 이스칸다르 샤(Megat Iskandar Shah)라는 무슬림 이름을 취했으며 파사이의 한 공주와 결혼했고 그의 영향으로 그의 신하 대부분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무드자파르 샤(Mudzaffar Shah)의 통치기(1446-59)에 이슬람은 국가의 공식 종교로 선포되었다. 그의 뒤를 이는 국왕들의 종교적 학식과 리더십 또한, 무역 및 정복과 연계해서, 주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궁극적으로 이슬람이 말레이 반도의 제 민족들뿐만 아니라 수마트라의 팔렘방(Palembang), 태국의 빠따니 같은 해안 및 강변 도시, 보르네오 북부, 브루나이, 필리핀의 민다나오(Mindanao) 섬까지 전파되게끔 하는 데 기여했다.
이슬람은 만약 1570년 스페인 정복이 없었더라면, 민다나오를 넘어 훨씬 더 광범위하고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스페인 국왕들이 이 지역에 기독교의 발판을 세우기로 함에 따라 기독교는 필리핀인들의 주된 종교로 자리잡아 갔다.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필리핀의 수백만 명의 토착인 무슬림들은 조상의 땅을 빼앗긴 뒤, 재이주되거나 더 남쪽으로 피해야 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이 땅의 소유권 문제는 2005년 세계은행 연구에서 확인되었듯이, 필리핀 무슬림들의 불행의 주된 원인으로 남아 있다.
믈라카가 1511년 포르투갈인들에게, 그리고 나중에 1642년 네덜란드인에게 함락되었을 당시, 자와의 왕국들은 당시 자와의 상당 부분이 이미 이슬람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이슬람 맹주 역할을 맡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한 역할은 대신 아체가 맡았다. 고전적인 말레이 문헌들에 따르면, 아체는 특히 강력한 무슬림 군주인 술탄 이브라힘(Sultan Ibrahim, 혹은 Ali Moghayat Shah라고도 알려져 있음)의 치세(1507-28)와 이스칸다르 무다 마흐코타 알람(Iskandar Muda Mahkota Alam)의 치세(1607-36)에 많은 말레이 왕국을 통솔했을 뿐만 아니라 활발한 중계무역을 전개했다. 아체는 전반적인 번영뿐만 아니라, 말레이 군도와 인도 사이의 교차 지점에 자리 잡은 전략적 위치, 그리고 지역의 급속한 상업화의 시대에 향료 무역의 지배에 힘입어 이슬람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영향은 나중에 술라웨시(Sulawesi), 롬복(Lombok), 칼리만탄(Kalimantan), 마카사르(Makassar) 같은 인도네시아 동부의 해안 지역까지 퍼졌다.
그러나 조호르(Johore)가 아체와 알력을 빚는 가운데, 네덜란드가 조호르와 손을 잡음으로써 결국에는 조호르가 우위를 차지했다. 조호르의 술탄들은 미낭카바우(Minangkabau)의 도전을 격퇴한 후 아체 통치자들이 과거에 했던 역할을 맡고 나섰으며, 조호르와 리아우(Riau)의 링가(Lingga)의 연합 술탄 왕국은 새 왕도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이슬람 부흥을 주도했는데, 그것은 17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이 특별한 술탄 왕국이 이슬람의 맹주 노릇을 한 것과 부유했던 사실은 후손들도 다 알게끔 기록으로 남겨졌는데,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두 편의 종교 문학 작품인 『투흐팟 울 나피스』(Tuhfat-ul-Nafis, “소중한 선물”)와 『살라실라 라자 라자 단 부기스』(Salasilah Raja-Raja dan Bugis, “말레이와 부기스 왕들의 계보”)가 그것이다.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 국가들의 이슬람 리더십에 있어서의 변화 - 파사이에서 믈라카, 브루나이, 아체, 조호르-리아우로 - 의 역사적 배경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슬람 전파의 매개체에 관한 한, 수피 선교사들과 무슬림 무역상인들의 역할은 잘 기록되어 있다. 마스짓(masjid 즉 모스크)과 마드라사(madrasah, 이슬람 학교) 같은 다른 종교적인 기관, 그리고 뽄독(pondok), 쁘산뜨렌(pesantren) 같은 더 작은 규모의 종교 기숙학교도 마찬가지이다. 무슬림 국왕(라자 Raja)과 술탄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은 이슬람과 그 가르침을 국경 너머까지 전파하는 일에 국가 자원을 이용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국경의 의미와 영토적 범위는 오늘날의 “국가”(state)와 “나라”(country)의 정의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수 세기 동안 라자나 술탄은 무슬림들의 삶의 중추였으며, 이들의 명령은 반드시 복종되어야 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무슬림 국왕들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슬람 공부 장려는 특히 이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그 신앙을 더욱 공고하게 했다. 거의 제국이라 할 만큼 넓은 지역을 다스린 국왕이 몇 명 있기는 하지만, 다른 상당수의 국왕들은 파사이, 믈라카, 아체, 조호르-리아우 경우처럼 역동적이며 부유한 술탄 왕국을 통치했다. 통치 지역 규모가 더 작은 국왕이라고 해서 무시할 순 없었다. 이들은 클란탄(Kelantan)의 술탄의 경우처럼, 다른 국왕들과 네트워크 관계를 형성하거나, 믈라카의 술탄의 경우처럼, 국왕이 어떤 나라에서 통치하는가에 따라 왕권을 이동하는 방식으로 통치했다. 두 번째 경우와 관련하여, “왕이 있는 곳에 왕국이 있다”라는 잘 알려진 말레이 격언이 있었다. 한편 이러한 이동은 수 세기 간 지속되었던 말레이 세계(“누산타라 Nusantara”) 내에서의 말레이인들의 “이주”(므란타우 merantau)와 결부되어, 동남아시아의 많은 지역에 수많은 디아스포라적인 무슬림 공동체들이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식민주의의 도래와 영향

이어서 식민주의가 닥쳤는데, 그것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이슬람의 영광과 위풍을 생각보다는 더 많은 방식으로 상당히 저해했다. 우선 앞서 언급한 주요 무슬림 술탄 왕국 세 곳이 무너진 후,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태국을 제외하곤 모두 19세기가 끝날 무렵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설계할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세력 범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은 당시 주요 열강들 -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 로 하여금 동남아시아 내 각자의 지배 지역을 “분할ㆍ통치”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은 믈라카를, 스페인은 필리핀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그리고 영국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싱가포르를 각각 차지하게 되었다.
이슬람과 무슬림 통치에 미친 식민 지배의 영향은, 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파급 효과를 고려하면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먼저, 식민 지배는 무슬림들의 생활을 포함하여, 동남아시아인들의 종교적인 삶의 많은 면을 바꾸어 놓았다. 식민 관리들은 자신들 관할 하의 국가 통치에서 서구식 세속적 모델을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바로 이들에 의해 이슬람 행정은 규제와 함께 표준화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이슬람 법과 사법체계(샤리아 shar'iah)는 “관료주의화” 되었다. 한편, 이것은 전통적인 무슬림 엘리트들과 샤리아의 실행이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대신 식민 정부에 의해 임명된 종교 관리와 세속법이 선호되었다.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은 말레이인과 그들의 종교에 영향을 주는 문제에 개입하지 않기로 한 182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에서의 약속을 파기했다. 약속 이행은커녕, 영국은 1826년 페낭(Penang), 싱가포르, 믈라카로 구성된 해협식민지를 세우자마자, 영국의 법을 많은 말레이 국가들에서의 토지법으로 삼았다. 어떤 경우는 이슬람 재판관인 카디스(kadhis)의 재판권 행사뿐만 아니라 이슬람 법정과 이슬람 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종교적 규정을 제한하고 영국 관리의 “조언”을 받도록 했는데, 조언이라는 것은 말이 조언이지 반드시 따라야 할 명령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행정기구로 이슬람 평의회(Majiis Agama Islam)가 구성되었는데, 이로써 술탄과 전통적인 이슬람 관료 및 율법사(ulama)의 역할과 권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말라야에서 열성적인 근무 경력을 남긴 몇몇 영국 관리는 이슬람 법이 말라야의 법이 되지 않도록 저지한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도 위와 유사한 무슬림의 정치적, 종교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샤리아와 아닷(adat 관습법)의 희석, 그리고 술탄과 전통적인 이슬람 지도자 및 율법사의 권력 약화를 보면 명백하다.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강력한 힘을 가진 울라마(ulama)들을 두려워하여, 특히 기독교 신자인 스나우크 후르흐롱허(Snouck Hurgronge)의 조언 하에 울라마의 활동을 심하게 억제하고 샤리아의 시행을 축소했다. 스나우크 후르흐롱허는 네덜란드 당국이 특히 아체에서 일어난 반네덜란드 봉기를 진압할 때 전략 수립에 도움을 준 바 있었는데, 이 때 메카에 대한 그의 박사 연구가 크게 활용되었다. 식민지 총독인 다엔덜스(Daendels)는 요그야카르타(Jogjakarta)와 수라카르타(Surakarta)의 궁정 대신을 자신이 임명하고 ‘강제재배 제도’(Culture System)라는 이름 하에 경제적 생산물의 유통이 식민 관리들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재설정하는 등, 자와 통치자들의 전통적인 권력을 제한하여 그들을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전락시켰다. 또한 네덜란드는 국가 행정의 이슬람화를 확대해 달라는 디포네고로(Diponegoro)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 결과 반네덜란드의 종교적 적대감이 형성되었고, 이는 결국 1825-31년의 자와 전쟁 으로 이어졌다.
필리핀은 스페인에 의해, 뒤에는(1899-1903) 미국에 의해 식민화되었는데, 이로써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기독교인이 다수인 유일한 국가로 변모되었다. 특히 스페인의 지배 하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장로인 다투(datu)와 펑훌루(penghulu)의 권력 중 상당 부분은 제한되었다. 무슬림들은 또한 모든 토지를 교회에 양도하는 ‘국왕 특권의 교훈’(Regalian doctrine) 도입 후, 조상 전래의 토지권을 박탈당했으며, 이후 스페인의 정치 및 종교 엘리트들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해양에 기반을 둔 수 세기 전통의 경제 체제가 내륙 기반의 경제로 변화한 것 역시 이슬람 통치자들의 위치와 영향력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통치자들은 그들의 왕궁을 바다나 강과 면하게 했는데, 이는 과세뿐만 아니라 항해 활동과 교역을 규제하는 통제 시스템 상에서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가 농업, 광업, 플랜테이션 중심으로 변함으로써 그러한 통치자들의 경제적 및 정치적 권력 토대가 약화되었다. 교회에 의한 적극적 개종 활동과 기독교도의 무슬림 지역으로의 이주는 한 때 민다나오의 다수 주민이었던 모로(Moro)족을 소수 주민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비록 필리핀의 무슬림들은 마라나오(Maranao)족, 타우숙(Tausug)족, 술루(Sulu)족, 마긴다나오(Maguindanao)족 및 기타 종족 집단으로 구성된 다종족 사회이지만, 이들은 비슷한 이슬람 법과 사법체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곧 제한을 받았으며, 기독교 및 세속적인 법으로 대체되어 나갔다.
무슬림의 삶에 있어 이러한 식민 지배의 영향은 대륙 동남아시아에서도 뚜렷했다. 이러한 영향은 미얀마에서 포르투갈과 영국의 역할이 줄어드는 가운데 프랑스 군대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점령한 후인 19세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만약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무슬림 집단들의 지적 및 사회적 힘, 그리고 식민적 점령에 대한 이들의 지속적이고 끈질긴 무장 투쟁이 없었던들,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과 무슬림들에 대한 식민 지배의 영향은 훨씬 더 컸을 것이라고 주장해도 무리는 없다.
무장 투쟁의 증거는 무슬림 지하드(jihad) 단체들이 일으킨 유혈 봉기와 무엇보다도 무슬림들을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것을 그 목표로 삼은 몇몇 이슬람 운동의 영향에서 뚜렷이 나타나 있다. 말레이 반도의 경우, 1832년 나닝 전쟁(Naning War) 이 원인이 되어 1876년 영국인 상주판무관 버츠(J.W.W. Birch)가 암살되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 민족주의 단체들이 파드리 전쟁(Padri Wars) 과 네덜란드인을 대항하여 산발적으로 일어난 다른 반란들을 주도했다.
분명한 것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이슬람 성장의 내용과 윤곽에 관해 논의할 때, 식민주의 요인 외 다른 요인들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국가별로 존재하는 정부 체제와 그 통치 패러다임의 유형이다. 그 적절한 예로 식민주의가 끝난 후 들어선 정권들의 “동화주의적” 경향이 무슬림 소수 집단들의 정체성 확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무슬림이 수적으로 다수인가 혹은 소수인가의 여부이다. 세 번째는 지배적인 문화와 종교들 그리고 전반적 환경이 이슬람과 그 신도들에 미치는 상대적 영향이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은 “국제적인” 요인으로, 9ㆍ11 사건 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은 그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요인들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해 국가별로 살펴볼 때 보다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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