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동남아시아에서의 선교 활동과 기독교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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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8 12: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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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에서의 선교 활동과 기독교의 전파

Robbie B.H. Goh

동남아시아의 기독교는 그 주요 사건들이 19세기 후반부터 발생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비교적 새로운 현상에 속한다. 동남아시아라는 맥락에서 기독교는 힌두교와 불교와 이슬람 등과 비교할 경우 분명히 소수를 위한 종교이자 근래에 들어서 비로소 그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종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만큼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시아의 근대 세계의 몇몇 측면 특히 교육, 의학 및 사회 사업 영역의 부분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아시아인 디아스포라와 세계화의 시대에 중요한 국제적인 네트워크의 기초를 놓는 데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기독교가 실재했음을 보여주는 초기 증거는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고학적 발견들은 (기독교가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전파되어)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 및 자와 섬의 일부 지역에 몇몇 기독교인 마을이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 정착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이들이 동남아시아의 초기 왕국들과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기독교는 16세기 초에야 동남아시아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종교가 무역 및 군사적 이해관계와 함께 유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점 이후로 아시아에서 기독교는 유럽의 식민적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퍼졌으며, 그 관계는 때로 복잡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리더십의 토착화와 토착적인 교회의 성장은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독립을 성취한 이후인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어났다.
가톨릭은 주요 개신교 선교 활동이 진행되기 훨씬 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전해졌다. 동남아시아에서 가톨릭의 영향이 남아 있는 초기 지역으로는 포르투갈인들이 1511년에 점령한 항구인 믈라카(Malacca)와 스페인이 그 소유를 1521년부터라고 주장하지만 16세기 후반에 들어서서야 확실히 지배하게 된 필리핀 군도 등이 있다. 위의 두 사례의 경우 기독교의 영향은 상이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주의가 종교적 개종을 강조하는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모로 보나 포르투갈인들은 개종 문제를 밀고나가는 것에 대해 보다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작은 국가를 이루며 주로 무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세계 도처에 몇몇 항구와 정착지의 형성 이상으로 식민지를 건설할 만한 자원을 갖고 있지 못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구에 인접한 내륙 지역에 대하여 여타 유럽 식민 열강에 견줄만큼 체계적이고 강압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이는 또한 종교적 개종의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의 문화적 유산이 보다 약하게 나타났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필리핀에 대한 가톨릭의 영향의 정도를 결정짓는 다른 요인으로는 해당 식민 열강의 지배 기간과 다른 식민 열강들의 상대적 힘 그리고 그들의 종교 정책 및 상호 유사성 등이 있다. 식민 세력으로서 포르투갈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은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17세기에 기울었으며, 포르투갈인들은 1641년에는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믈라카에서 쫓겨났다.
가톨릭 지배 세력에 대항하여 독립 전쟁을 치루었으며 가톨릭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루터파 개혁교회(Lutheran Reformed church)를 국가적 교회로 삼았던 네덜란드인들은 식민지 팽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군도를 포함하여 어느 곳에서든지 가톨릭을 억제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스페인은 1898년에 섬들을 미국에 양도하기 이전까지 4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필리핀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미국 또한 현지인들을 미국적 형태의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열의를 띤 개신교 선교사들을 데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가톨릭에 대해 네덜란드인들처럼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초반에는 오랜 기간 자리잡은 필리핀인들의 가톨릭에 대항하여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또한 16세기에 인도 동쪽과 믈라카 해협의 북쪽에서도 무역 루트를 장악하게 되면서 미얀마와 캄보디아에도 가톨릭을 전파했다. 하지만 아시아 내 다른 포르투갈 식민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종교적 영향은 17세기에 포르투갈 제국이 위축됨과 더불어 급격히 감소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은 이 국가들의 전체 인구 중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미얀마에서는 1%를 약간 상회하며 캄보디아에서는 0.5%에 못 미치는 실정이다.
17세기 베트남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가톨릭은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베트남에서의 가톨릭은 비록 17세기와 18세기에 복잡한 운명을 경험하기도 했으나, 19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의 식민적 이해관계에 의해 후원을 받게 되었다. 1862년의 조약으로 인해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가톨릭 금지령이 철폐되었으며 또한 남부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로써 베트남인들의 기독교 개종뿐 아니라 학교 설립과 사회 사업을 위해서도 애쓴 프랑스 사제들의 사역은 보호와 격려를 받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가톨릭은 개신교 교파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지배 시기에는 퇴보를 겪었지만 오늘날 전체 인구의 약 6%를 차지하는 등 여전히 상당한 수의 신도들을 갖고 있으며 베트남에서 최대의 기독교 교파로 남아 있다. 가톨릭 사제들은 19세기 후반에 라오스에도 갔지만 영향을 별로 주지 못했다. 가톨릭은 오늘날 라오스에서 그 신도가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수 종교이다.
요컨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지속적인 기독교의 존재를 처음으로 각인시킬 수 있었던 것은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등의 초기 상업적 및 식민적 팽창 사업에 종종 병행되었던 가톨릭 사제들의 사역 덕분이었던 것이다. 비록 기독교의 존재는 각 나라에서의 식민 지배의 정도와 기간에 따라 차이가 나는 등 동남아시아 전 지역에서 고르게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지역의 상당한 부분에서 문화적, 교육적 및 종교적 생활에 영속적인 영향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가톨릭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종교 형태를 이루고 있는 필리핀을 제외하더라도, 가톨릭은 오늘날 대다수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비록 필리핀과 베트남 같은 소수의 예외적인 국가를 제외하고는 모든 개신교 교단을 합친 것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가장 큰 단일 기독교 교파로 자리잡고 있다.
개신교는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인을 필두로) 17세기부터 시작된 일련의 운동을 통해 가톨릭보다 훨씬 뒤에 동남아시아에 도래했다. 개신교 선교의 주된 활동은 물론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동남아시아의 두 주요 개신교 식민자였던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은 모두 초기에는 무역과 이익에 주된 관심을 보였으며, 식민지 사업을 맡았던 사적인 회사(역주: 동인도회사)들은 종종 선교사들을 잠재적인 방해 요소로 간주하여 훼방하기도 했다. 두 경우 모두 사적인 회사 대신 정식 식민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비로소 선교사들이 네덜란드 식민지와 영국 식민지에서 보다 확고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인도네시아 도서들에서 1605년부터 자리잡기 시작했다. 비록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처음에는 상업적 이익에 주된 관심을 보였으나, 나중에 (특히 19세기에) 도서들에 대한 지배가 강화된 이후에는 네덜란드 개혁파 선교사들을 필두로 복음주의적 활동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동남아시아에서의 개신교 선교 활동은 19세기에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영국의 말라야와 미얀마로의 식민적 팽창과 19세기 말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로 인해 촉진된 것이었다.
영국은 초기에 광대하고 복잡한 인도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 대한 식민적 개입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식민지 야심이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향하게 되자 - 영국으로의 영토 할양으로 끝난 1824-26년의 제1차 영국-버마 전쟁과 인도네시아에서의 철수에 대한 대가로 말라야에 대한 영국의 지배 강화로 결말지어진 1824년의 영국-네덜란드 조약 등과 더불어 - 그들은 네덜란드인들보다 훨씬 신속하게 개신교 선교사들의 유입을 도왔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의 인도 경험에서 얻은 결과였다. 즉 비록 영국동인도회사가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종교적, 문화적 분쟁의 가능성으로 인한 잠재적 불안 요소로 보고 이들의 체류에 반대했지만,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등의 선구적인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미 1793년부터 인도로 오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동인도회사가 1813년에 헌장을 개정한 이후부터는 더욱 많은 선교 단체들에게 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이 19세기 전반부 후기에 인도에서 동남아시아로 팽창해 감에 따라, 선교적 노력과 식민-상업적 시도 사이의 이러한 협력 관계는 미얀마와 말라야 등의 나라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식민 정부의 강압 하에서 동남아시아에서 퍼진 것은 아니었다. 분명 몇몇 경우에는 이러한 일이 발생했지만, 그것은 대개 합의된 정책에서라기보다는 개개인의 행정가들에 의해 행해진 것이었다. 더욱 엄격하고 더욱 개입주의적인 식민 통치로 정평이 나있는 네덜란드인들과는 달리, 영국인들은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쓴 후에는 식민지의 평화와 교역이 어지럽혀지지 않는 한 종종 토착적 관습과 일상생활을 그대로 놔두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통치 방식에서의 이러한 차이는 기독교 전파의 방식에도 불가피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에서의 기독교 발전의 몇몇 유형들은 - 식민주의 시대 후기 동안과 식민주의 종료 후에도 신도의 수가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성장한 것, 개종이 다양한 민족들과 지역에서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고르게라기보다는 불균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토착인 지도자가 일찍부터 배출되었다는 것 등 – 기독교가 전반적으로 볼 때 강제적이 아닌 자발적인 현상이었음을 시사한다. 동남아시아에서 기독교가 식민주의로부터 받은 지원이란 대개 선교사들이 안심하고 일하며 이동할 수 있고 교육, 의학 및 복지 사업을 통해 사회적 변혁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일종의 사회정치적 질서 정도였다.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이 행한 지배적인 역할을 감안해 볼 때, 동남아시아의 몇몇 초기 개신교 선교가 영국 국교회의 런던선교회(Anglican London Missionary Society), 영국 감리교, 영국 침례교 등의 영국인 단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런던선교회는 1815년 믈라카에서 울트라 갠지스 선교회(Ultra-Ganges Mission: 영국 선교사들이 당시 동남아시아에서의 사역을 인도 선교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명칭)를 발족했다. 1819년 영국동인도회사가 싱가포르에 상관을 세우자, 런던선교회는 믈라카의 기지를 이곳으로 옮겼다. 19세기 초 런던선교회의 주 사역은 영국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예배였으며 말라야의 아시아인들에게는 영향을 거의 주지 않았다.
영국 국교회 선교사들은 여러 측면에서 동남아시아를 중국보다 덜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중국인들의 적대심으로 인해 중국에서 내쫓겼다. 그러다가 1842년 남경(南京)조약으로 중국이 항구를 어쩔 수 없이 영국인들의 무역에 개방하게 되자, 울트라 갠지스 선교회는 홍콩으로 이전되었고, 영국 선교사들의 대다수가 중국에서의 사역에 다시 노력을 기울였다. 말라야와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다른 선교 단체들로부터 활기찬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영국 국교회는 제1차 영국-버마 전쟁이 끝나 하부 미얀마 의 영토가 영국에게 할양된 후인 1826년부터 미얀마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말라야에서 그랬듯이, 초기 영국 국교회 선교사들은 미얀마에 있는 영국인 군인과 민간인 상대로 예배 사역을 했다. 영국 국교회 선교사들보다 더 일찍 왔던 영국 침례교 선교사들은 18세기 후반에 동부 인도(주로 벵골 지역)를 개척했다. 이들은 이미 1813년에 그 이웃나라인 미얀마로 선교 사역을 확대해 나갔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한 무리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동남아시아에 왔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미국 교회들의 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다. 19세기 중엽에 (뒤에 파키스탄이 된 지역인) 서부 인도를 개척한 선교 단체 중 하나였고 현재에도 이 나라의 최대 단일 개신교 교단인 장로교 교회들은 1851년에 말라야로, 그리고 1852년에는 미얀마로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중국의 문호가 개방된 이후에도 그곳으로 가기를 거절한 런던선교회 선교사들은 이미 1843년에 싱가포르에 장로교 교회를 세웠다. 영국 및 미국의 감리교도들은 19세기 후반에 (스리랑카와 북부 인도에 각각 위치한) 그들의 아시아 선교 기지를 떠나 각각 1887년과 1879년에 미얀마에 들어갔다. 더욱 팽창 지향적이었고 이 시기의 다른 영국인들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던 미국의 감리교도들은 (싱가포르에서 시작하여) 1885년에 말라야로, 1899년에 필리핀으로 그리고 1905년에는 인도네시아로 네트워크를 확장해 나갔다. 20세기 초부터 중엽까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들어온 후발 개신교 그룹으로는 제칠일 안식일 재림파, 하나님의 교회, 구세군, 남부 침례교, 루터파 교회, 성경 장로교(Bible Presbyterians) 등 여러 단체가 있다.
이리하여 20세기 초가 되면 개신교 선교는 비록 그 영향력이 각국의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각각의 선교 단체가 해당 국가에 투입한 자원에 크게 좌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의 대다수 국가들에서 확립되었다. 많은 수의 개종자를 얻을 가능성을 지닌 특별히 매력적인 선교지로 간주되었던 몇몇 국가(인도, 중국, 한국 등)에서는 다양한 선교 단체들이 자신이 활동할 지역과 영토를 택하는 이른 바 예양(禮讓) 협정(comity agreement)을 준수해야 했다. 물론 이러한 협정이 항상 엄격히 지켜졌던 것은 아니다. 개신교 선교 활동은 (필리핀과 일부 베트남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의 초기 가톨릭 선교 활동과는 달리) 식민주의적 장치 덕분에 많은 아시아 국가로 급속하게 침투할 수 있었다. 식민주의적 장치는 사실 선교사의 존재를 환영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 사역의 많은 부분이 이루어질 수 있게끔 한 상대적인 안정성과 안전이 확보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선교 단체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럽의 산업화와 과학적 진보의 시대와 같은 시기에 동남아시아에 도래한 개신교 선교 단체들은 그들이 활동한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에서 도구로 작용했다. 교육과 보건에 대한 그들의 기여는 특히 현저하다. 가톨릭 선교와 개신교 선교는 모두 교육을 상당히 강조했다. 오랜 전통의 고전적 장학제도(특히 철학, 윤리, 언어 등의 분야에서)와 “맥락적” 교육(개인이 각자가 속한 사회의 맥락 안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는 것을 말함)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강조를 해온 가톨릭 교회는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에서 이러한 교육 브랜드를 보급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특히 필리핀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필리핀의 잘 알려진 가톨릭 대학들로는 산토 토마스(Santo Tomas) 대학교(1611년에 설립되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가톨릭 대학 중 하나임)와 아테네오 데 마닐라(Ateneo de Manila) 대학교(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1859년에 설립됨)가 있다. 보다 근래에 와서는 태국과 인도네시아에도 가톨릭 대학이 설립되었다.
개신교 선교 단체들은 즉각적인 개종(이는 때로 논쟁거리가 되었고 부모와 대중 그리고 심지어는 학생들 자체로부터도 항의를 불러일으켰음)이 아니더라도 교육을 원주민 아이들을 기독교의 영향 아래 둘 수 있는 도구로 보았으며, 나아가서는 이를 장기적인 영향과 연결관계의 일부로 활용하여 점차적인 개종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교육 상황이 형편없었다는 점과 식민 정부들이 원주민 아이들의 기초 교육에 많은 돈과 자원을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은 개신교 선교 단체들에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다. 가톨릭에 더하여 영국 국교회, 감리교, 장로교 등의 개신교 단체들은 특히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교육 기관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그 교육 범위는 종종 유치원부터 신학교 및 대학교까지, 단순한 마을 학교에서부터 대도시의 대학과 고등학교까지 포함했다. 영국의 지배 하에 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미션스쿨들이 공직, 전문 직종 및 회사에서 일하는 경력에 유익한 것으로 입증된 진보적인 영어권 교육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 전문 직종 및 비즈니스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 이들 기관의 졸업생들은 역으로 직ㆍ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이 학교들의 부와 명성을 증진하는 데 기여했다.
선교사들이 교육 다음으로 상당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한 분야는 보건이었다. 이는 대개 식민 정부가 제공할 수 있거나 혹은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농촌 지역이나 도시의 빈민가에 살고 있는 빈곤층의 절대 다수의 필요 사이의 격차를 메우는 차원에서 행해졌다. 동남아시아에서 다양한 서양식 치료법과 진료 시설을 설립한 것은 가톨릭 선교 단체들이 처음이었다. 그들 중 어떤 것들은 이미 16세기에 세워졌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작은 규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자애로운 친절을 제공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hospitium의 원래 의미에 더욱 가까운) 시설이었으며, 뒤에 그들 중 많은 시설들은 비가톨릭계의 손으로 넘어갔다. 예를 들어 필리핀의 산 라사로(San Lazaro) 병원은 한 스페인 수도사에 의해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에서 1577년에 진료소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병원으로 발전했으나, 결국에는 미국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가 필리핀의 공공 의료기관이 되었다. 오늘날 동남아시아에서 운영되고 있는 현대적인 공인된 가톨릭 병원의 상당수는 대부분 20세기에 설립되었다. 예컨대 1898년에 태국에 설립된 세인트 루이스(Saint Louis) 병원, 1917년과 1921년에 각각 설립된 인도네시아의 신트 카롤루스(Sint Carolus) 병원과 보로메우스(Borromeus) 병원, 그리고 1961년에 싱가포르에 설립된 마운트 알버니아(Mount Alvernia) 병원 등이 거기에 포함된다.
미국의 선교 단체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과 의료 인력을 제공받은 개신교 선교사들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도착하는 즉시 의료 시설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침례교, 성공회, 감리교 및 장로교를 포함하는) 상당수의 주류 미국 개신교 교단들은 필리핀의 정치 권력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이전한 직후인 1899년과 1902년 사이에 선교사들을 필리핀으로 파송했으며, 1903년에 성공회가 세운 모셔 홀(Mosher Hall: 현재의 St. Luke’s Hospital)과 1906년에 감리교가 설립한 메리 존스턴(Mary Johnston) 병원 등을 포함하여 1910년까지 여러 개의 병원을 설립했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교단인 점과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국가들에 비교적 늦게 등장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제칠일 안식일 재림파는 동남아시아에서의 의료에 기여한 개신교 단체 중 탁월한 존재이다. 미국의 제칠일 안식일 재림파 선교사들은 태국에서 1937년에 방콕 미션(Bangkok Mission) 병원과 1940년대 후반에 푸껫 어드벤티스트(Phuket Adventist) 병원, 말레이시아에서 1924년에 페낭 어드벤티스트(Penang Adventist) 병원, 그리고 싱가포르에서는 1948년에 영버그 메모리얼(Youngberg Memorial) 병원(뒤에 문을 닫았음)을 설립했다. 이는 제칠일 안식일 재림파가 전세계적으로 1,100만 명의 신도를 보유한 작은 교파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일로, 이와 비교하여 감리교와 침례교는 미국에서만 각각 1,500만 내지는 2,000만 명과 2,600만 내지는 2,900만 명에 이르는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기독교 단체들이 추진하고 설립한 다른 종류의 사회 사업과 사회적 기관으로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전문 치료 센터, 안과 및 피부과 병원, 면역 프로그램과 접근이 어려운 농촌 지역의 의료 시설 등 다양한 형태의 진료소와 의료 시설이 포함된다. 선교 단체들과 교회들은 농업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가뭄, 홍수, 태풍 및 화산 폭발 등 자연 재해에 취약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같은 국가에서는 농업 원조 프로그램을 서둘러 개발하여 (무엇보다도) 새롭고 향상된 농경 방식을 가르쳐 주었고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했으며, 이를 통해 농촌 마을들이 곤궁한 시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 그 원조 프로그램은 또한 종종 농촌의 의술 및 보건 교육과 진료소 및 면역 프로그램 개발에 있어서도 도구가 되었다.
이렇듯이, 각 선교 단체의 가용 자원의 차이뿐만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교단들은 각기 강조하고 집중하는 분야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타났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가톨릭의 보루이자 아시아에서 기독교 인구가 지배적인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또한 가톨릭은 베트남에서 전체 인구의 약 6.5%를 차지하여 다른 기독교 교파를 모두 합친 수(약 1.5%)보다 많은, 가장 지배적인 기독교 교파이다. 두 경우 모두 가톨릭 세력(스페인과 프랑스)에 지배 당했던 식민지 역사가 이러한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명백하다.
대부분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개신교 기독교인들을 전체 합치면 그 수가 가톨릭 신도의 수를 능가한다.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유럽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던 국가인 태국은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약 1.5%)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이다. 한편 복잡한 식민 지배의 과거를 지닌 캄보디아 같은 나라도 오늘날 태국과 비슷한 기독교 인구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1%를 약간 상회함). 이는 식민주의에 대한 폭력적인 저항과 1960년대부터 1990년까지 오랜 내전의 혼란으로 인해 소수인 기독교인들의 유산을 포함한 이 나라의 종교적인 과거의 대부분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식민 열강인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미얀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나라들에서는 예상대로 개신교 교단들 특히 영국 국교회, 감리교 및 루터교 등이 주요 기독교 단체로 활동해오고 있다.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 다양한 “독립적인” (즉 토착적 기원의) 개신교 교회들의 성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선교 단체의 설립을 통해 다양한 교단들이 생기고 확산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다양한 선교 단체의 이러한 증식은 기독교 조직들이 지역사회로의 침투, 새로운 지역에서의 교회 개척, 새로운 목회 영역의 확보 및 개종자의 획득과 관련하여 서로 협력하는 동시에 경쟁함으로써 일반적으로 다채롭고 폭넓은 사회 프로그램과 제도의 개발을 자극해 왔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에 들어온 다양한 기독교 선교 단체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바로 유럽-미국식 모델, 근대적 교육, 여성에 대한 사회적 태도, 문화 전통주의, 그리고 각종 복지 및 구제 사업을 추진해 나감을 통해 사회적 변혁의 전반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 단체들은 식민 정부가 제공할 능력이나 의사가 없는 지역사회에 원조와 서비스를 제공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 소수민족, 새로운 이주민, 여성, 농촌 마을 등 빈곤하고 소외된 집단을 겨냥하여 이러한 집단의 곤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통합과 지역사회 건설을 위한 아이디어를 계발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행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사역이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 토착적 및 전통적 종교들의 반대와 방해, 현지 당국의 박해 (유럽 식민 시대 전에 활동했던 가톨릭 신부들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음), 기독교 선교사들이 현지 주민들의 문화와 전통적 방식을 방해ㆍ오염시킨다는 비난, 그리고 기타 유사 분쟁과 긴장 등이 이에 해당된다.
또 한 가지는 기독교가 동남아시아에 미친 영향의 정확한 정도를 평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 인해 (예를 들어 신자의 정의, 데이터 수집의 문제, 그리고 “공식” 종교 외의 다른 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정부의 방해), 종교 관련 통계가 항상 신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기독교가 한 특정 국가의 기독교 신자 수를 능가하는 사회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단순히 수치상으로 볼 때에는, 기독교가 필리핀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모든 나라에서 소수 종교이며, 실제로 이들 중 몇몇 국가에서는 작은 신앙공동체에 불과하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는 반대로, 기독교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교육, 의학 및 사회 생활에 두루 기여한 사회적 효과를 가져왔으며 지금도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이러한 효과는 실제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범주 너머로 확산되었으며 세계화 시대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미래의 사회적 변혁을 창출하고 예측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행하게 될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수십년과 21세기 초 동남아시아의 기독교가 이룩한 주요 발전으로 “독립” (단어가 내포하는 여러 의미대로) 교회 운동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많은 경우 거대한 회중을 모으고 새로운 조직 전략, 예배 형식 및 대중매체를 적용하는 것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세기 중엽에 다양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의 독립이 다가옴에 따라, 자율적인 민족 교회의 설립을 향한 움직임도 각 교단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현지 지도자들이 교회 리더십을 장악하는 것으로의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주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오래된 주요 교단들의 경우 민족 교회들은 여전히 국제적 교단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예배, 조직의 명칭과 구조, 국내외의 협력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각 교단적 질서와 보조를 맞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마지막 수십년과 21세기의 시작 시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오래된 교단 관계과 조직 및 예배로부터의 분리를 보여주는 독립 교회의 역동적인 성장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많은 경우, 이러한 독립 교회들은 거대한 회중을 끌어모으는 것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오순절” 및 “카리스마적” 가르침과 교리에 대한 지지, 현대 음악과 대중매체 기술의 활용, 그리고 역동적이고 활력에 찬 목사들의 리더십을 통해 가능했다. 이 목사들은 미국 및 다른 지역의 신학교에서 훈련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현지 주민들의 필요와 기호에 맞게 적응시켰다. 이러한 새로운 독립 교회들은 영적인 문제 그 자체보다 교인 수와 재정에 대해 관심이 더 많다는 것 그리고 신자를 모으고 명성을 쌓기 위해 복음을 “희석시키고” 주류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비난 등 논란이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동남아시아에서의 교회 발전의 새로운 원동력과 방향을 대변하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미국과 서유럽에 뿌리를 둔 교회에 맞춰 있는 교단적 연결관계로부터 이별한다는 것임과 동시에 교회가 새로운 예배 형태, 대중 매체와 상황적 요인을 자발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결구조이다.
그리하여 21세기의 시작은 동남아시아에서의 기독교의 흥미로운 발전, 새로운 가능성, 그리고 사회적 변혁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비록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동남아시아의 주요 허브 국가들, 특히 필리핀, 싱가포르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기독교에 대해 조사하면, 교회 및 신자들,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간의 관계, 그리고 교회들의 사회적 영향에서 발전적인 경향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은 기독교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훨씬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거나 특정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날 것 같은 사회적 긴장으로 인해 교회가 분쟁과 저항에 직면하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의 상황에 비추어 균형되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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